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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남편 따라 순직한 우 씨 부인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7.22 20:13 수정 2019.07.22 20:13

김 지 욱 전문위원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한국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19세기 당시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조선은 격변하는 세계질서의 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다양한 정치·사회적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내부로는 세도정치기 삼정의 문란에서부터 시작된 극도의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외부로는 산업혁명 이후 경제,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던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개방 압력으로부터 민족을 보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국가 안팎에서 난립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조선의 미래에 심각한 불안감을 조성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의식이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싹틀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학파 중 하나로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를 들 수 있는데, 화서학파는 도학사상에 기초하여 인간 내면에 집중함과 아울러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 학파였다.
따라서 이러한 도의 실현에 주목하다 보니 사실과 가치의 문제를 판단하는 현실문제에 보다 치중할 수 있었으며, 자연히 이들의 활동은 구한말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운동의 실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화서학파의 민족의식은 화서학파의 문인들뿐만 아니라 화서가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다양한 여성 민족운동의 실천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구한말 당시 전기 의병운동을 시작으로 중기, 후기 의병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잔혹한 진압 작전과 이에 대한 민족의 저항 활동은 더욱 격렬히 전개되었으며, 이렇게 한말 의병투쟁이 확대될수록 양반, 유생, 군인, 승려 등 참여 계층이 다양화되기 시작했고. 이윽고 전 계층, 전 지역, 전 민족이 참여한 민족저항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때에 남편을 따라 의열정신을 보이며 일제에 저항한 여성이 있었으니 그 분이 바로 이진용 의병장의 부인 우 씨이다.
우 씨 부인은 황해도 평산군 목단면의 단양 우 씨 집안의 판관 우병열의 삼남삼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우병열은 평산의병의 중군장으로 활약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매진했던 분이다.
집안에서 맏딸로 자라면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서당에서 공부를 하는 등 기본 소양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또한 남편 이진용이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황해도 일대에서 의병항전을 했던 행적과 이후 남편과 아버지의 망명에 동행하여 만주에서 남편을 뒷바라지 하며 독립활동 했다는 점에서 볼 때 친가와 시가의 항일의식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버지 우병열은 이항로-유인석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계승하였고, 의병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남편 또한 화서학파의 계열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 또한 화서학파의 민족의식과 의병활동의 전반적인 흐름을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런 일화가 있다. 남편의 의병투쟁 중에 일본의 앞잡이가 집으로 찾아와 남편을 잘 설득하여 귀순케 하면 후한 상을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이에 우 씨 부인은 왜의 주구에게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만약 남자였다면 이러한 때에 나라를 위하여 한 몸을 바쳤을 것이다. 다만 여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방안에 들어앉아 남자로 태어나지 못함을 한탄하고 있거늘, 어찌 벌레만도 못한 너 같은 것과 더러운 담론을 할 것이냐!”
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우 씨 부인은 일본 앞잡이에게 남편의 소재를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평산경찰서로 끌려가 갖은 협박을 다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강력한 저항으로 일관하며, 온갖 위협에도 한국여인의 절의는 변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결국 이들은 우 씨 부인의 저항에 더 이상 협박을 하지 못하고 석방시켰다.
이후 남편 이진용은 경의선 부근의 봉산·서흥·신계·적성 등지에서 의병투쟁을 이어갔고, 개성과 형산·곡산 등에서도 일본의 기병부대와 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무장의 현실적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만주로 망명한 후 독립운동기지를 만들며 항일 투쟁을 이어갔으며, 조선인들을 규합하여 ‘충의사’라는 비밀단체를 만들어 애국청년단체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이때 우 씨 부인 또한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관전현 자루골에 자리 잡고 의병투쟁을 지원하였으나, 밀정의 밀고로 인해 남편 이진용이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1917년 5월 25일 남편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부인은 즉시 편지를 써 남편에게 격려의 글을 남겼다.
“이 몸도 머지않아 죽어서 당신을 고향 무덤 속에서 만나보겠습니다”
그녀는 이미 남편의 죽음을 예측하고 나라를 위해 절의를 지키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마침내 1918년 5월 1일 남편의 부음을 듣고, 우 씨 부인 또한 헛간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우 씨 부인의 유해는 자루골에 안치되었고, 당시 명망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자발적으로 의열비와 함께 열녀비를 세웠다. 1994년 중국정부도 이를 기려 부인의 의열비·기념비를 건립할 것을 지시하며 다음과 같은 문건을 발송하였다.
“당시 민중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우 씨의 유해를 안장하였다. 이진용 선생의 항일의거와 우 씨의 견강한 절개를 기념하기 위하여 당시 민중은 이 씨 부부의 의열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비문을 새겨 그들의 영용한 행위와 견강한 절개를 널리 전해지게 하였다”
이렇듯 화서학파의 맥을 함께 이어받은 두 부부는 일제에 대한 한국인의 항일의지와 민족정신의 기상을 온 세상에 널리 알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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