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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경문단사(聞慶文壇史) (상)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7.23 20:21 수정 2019.07.23 20:21

김 시 종 시인·자문위원
국제PEN클럽 한국본

필자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시인으로 활동하던 1967년엔 한국문인협회에 등록된 회원수가 500명에 불과하여 문인수가 얼마 되지 않아 문인(文人)들이 귀금속(금·은) 같이 존재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았다.
1960년대(代)에 문단에 이르는 통로(通路)는 극히 좁았다. 서울에서 발행되는 중앙일간신문에서 공모하는 신춘문예 해당부문에 당선되거나 당시 하나밖에 없는 월간문예잡지 ‘현대문학’의 신인 추천과정에 응모하여, 1회(초천)·2회·3회(추천완료)의 추천과정을 마쳐야 했는데 1회 추천을 거쳐 10년이 돼도 추천완료(종천)를 못해내어, 썩 달걀(?)이 된 불운한 문학지망생도 한둘이 아니었다. 당시는 문학지망생만 그런게 아니라 사법시험 응시도 1년에 10명 뽑다가 정원을 83명으로 늘였지만, 사법시험에 통과하기가 하늘에 있는 별 따기보다 힘들었다.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 당선은 사법시험보다도 더 어려웠다.
서울소재 일간신문에서 해마다 연말에 공모하여 설날(양력 1월 1일)에 발표하는 신춘문예는 5~6개 신문사에서 모집하는 신춘문예 당선자 총원이 30명 남짓했다. 시나 소설등 주특기를 살려 응모하겠지만, 평생(몇십년)을 응모해도, 예선도 통과하지 못한 지망자가 80%를 웃돈다.
1960년대 중반의 어느 해다. 신춘문예 공모 소설지망생인 청년은 당시 올드미스(29세)인 아가씨에게 올해는 신춘문예가 될 듯하니, 당선 상금을 받아 결혼을 하자고 굳게 기약했지만, 낙방생의 딱지를 끝내 떼지 못하여 기다리던 애인(올드미스)은 영원히 문학도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29세 처녀는 햇병아리에 불과하다. 애인을 놓친 불운한 예비 작가에게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신춘문예는 아니지만 일류신문사에서 모집하는 장편소설 공모에서 가작입선(준당선)하여, 많은 상금(고료)을 받고 입선작은 해당 일간신문에 연재가 되어 쪼단한 쥐구녕에도 밝은 빛이 들게 되었다.
필자의 경우엔 만 25세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시조부문에 당선하여 일찍 기성시인이 되었다. 필자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던 해엔, 동아일보(정신)/조선일보(방호=박항식교수), 중앙일보(김시종) 등 당선자가 총3명에 불과했는데 필자(김시종)가 그중 최연소당선자였다. 당시 필자가 받은 중앙일보 신춘문예 상금은 2만원으로 당시 교육대학졸업 초임교사 첫 봉급이 6천원에 불과했으니, 상금이 후한 편이었다.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초기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착시를 일으켜 그야말로 기고만장했지만, 신춘문예 당선은 영광이 아니라 험한 가시관이었고 좋은 시를 쓰기 위해 진짜 피땀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필자의 경우는 당선되기 전에 시 전반(자유시·시조·동시)을 철저하게 공부했고, 산문(소설·수필·아동문학)에도 수준급이었다. 시조(정형시)를 쓰되, 자유시의 흐름을 포용하여 현대문학 시월평에도 좋은 평가를 받아 필자야 용기백배했지만 일부시조시인들의 질투가 가관이었다.
비록 정형시(시조)로 신춘문예를 통과했지만 소재에 따라 자유시도 A급 문학잡지에 발표하여 평론가를 환호케 하여, 문학잡지 시월평란에 귀빈대우를 자주 받았다. 월평(月評)에 좋은 대우를 받은 자작시를 모아 시집을 자주 엮게 되었다. 문단등단 초기에는 앞만 보고 시작품 발표에 전력투구했지만 경상북도 문경군에 거주하는 유일한 문인(文人)으로 사명감을 느껴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를 창설하여 지역문학 활성화에 큰 불을 점화(點火)하게 되었다.
필자는 가정에서도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었지만, 1960년대(代)의 문경군에 거주하는 유일한 기성시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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