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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욜로은퇴] 강남 집을 못 산 분들께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8.06 19:41 수정 2019.08.06 19:41

김 경 록 소장
미래에셋은퇴연구소

부부간에 집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 경우를 자주 봅니다. 제 친구는 아내에게 두 번의 부동산 매수를 제의했다 모두 거절당했는데 그게 성수동과 여의도입니다. 지금 그 아내는 집 얘기만 나오면 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와 반대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내가 강남에 집을 사자고 했는데 ‘세계 경제가 어떠니, 공기가 안 좋니’ 하면서 반대했다가 지금은 계층이 추락해버린 경우입니다.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지고 우울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나서 가격이 떨어지는 것보다 못 샀는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르면 ‘멘붕’에 빠지거든요.
저는 강남에 집이 없습니다. 신혼 때 13평 과천 아파트가 싫다고 사지 말자고 한 것에 대해 지금도 아내에게 심심찮게 한 소리 듣고 있습니다. 결혼 직후 서대문에서 전세로 5년 살다 고양시 일산에 분양 당첨이 되는 바람에 이사 온 게 지금까지 눌러앉게 되었습니다. 부동산 투자가 아니라 일을 해서 버는 소득과 금융자산을 통해서 자산을 증식하겠다는 게 신념이었지만, 강남과의 집 값 격차를 보노라면 자괴감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때면, 여기 살면서 일어난 일들을 살펴 봅니다. 이사오자 바로 수 년을 애 먹이던 박사 논문을 썼고, 첫째와 일곱살 터울이 나는 딸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같은 직장을 20년 넘게 무탈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폐에 결절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스스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전에 아팠던 흔적이었나 봅니다. 공기 좋은 데 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병이 왔다가 사라졌다는 위안을 해 봅니다. 이곳에서 제게 주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시간을 한 곳에 살다 보니 세월의 깊이를 느낍니다. 첫 애한테 한자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요즘은 한자를 배우는 학생들이 없는지 한글 깨치기와 글씨 쓰기를 가르친다고 아파트 창에 붙여 놓았습니다. 저렇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게 삶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간혹 엘리베이터를 탔다 놀랄 때가 많습니다. 다 큰 처자가 인사를 하는데 가만히 보니까 꼬맹이 때 얼굴이 보입니다. 모두 어릴 때 모습들만 기억나는데 그 얼굴들이 부모를 닮아가는 걸 보고 또 놀랍니다. 입주할 때 제 나이쯤이던 남자들은 어느덧 어깨 굽어지고 걷기조차 불편해졌습니다. 20년 후면 내가 저렇게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얽힙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는 옛 건물과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13세기에 태어난 인문학자이며 신곡(神曲)을 쓴 단테가 700여 년이 지난 지금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자기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단테의 생가에는 700여 년에 걸쳐 있는 많은 시간의 이야기들이 쌓여 있음을 봅니다. 제가 38년 전에 자취와 하숙을 하던 서울 아현동과 염리동 집은 집의 흔적은 고사하고 그 골목길도 없어진 것과 대비됩니다.
집을 3~4년에 한번씩 옮겨 다녔으면 돈도 벌고 다양한 공간을 마주하는 즐거움도 덤으로 얻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세상은 나와 같은 사람에게 시간의 맛을 보여준다는 위안을 하곤 합니다. 아마 자주 옮겨 다녔으면 시간의 흐름이 주는 깊이를 몰랐을 겁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이치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강남 집의 부(富)에 못지않은 가치 있는 것을 하늘이 저에게 주었는데 그것을 스스로 잊고 있지 않나 반성을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다른 사람이 가진 걸 보고 속상해 하는 격입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이 최적일지 모릅니다. 내가 가지 않은 길을 생각하고, 지금 가진 것을 생각하고,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理)에까지 생각이 미칩니다.
강남 집을 놓친 것 때문에 부부 불화가 심해졌다는 지인은 자신이 이만큼 살아온 것이 대견하지만 아내가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편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감사한 일이고, 아내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당연히 주어진 것이며 좀 더 플러스 될 수 있었던 삶에 대한 아쉬움입니다. 관점의 차이가 부부간의 거리까지 멀어지게 한 셈입니다.
프랑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이라는 책에서 너무 심한 불안은 삶을 해친다고 봅니다. 저자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기대를 낮추는 게 심한 불안을 줄이는 해결책이라고 합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 단순히 인생에 대한 기대를 낮추는 것을 넘어서, 자신이 걸어가지 않은 길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삶의 균형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끝없이 플러스(+)만 추구하는 마음에 제동을 걸어줍니다. 성경 마태복음 13장에는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며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사느니라”라는 비유가 있습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는 평범한 일상에 보물이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삶은 항상 균형 잡혀 있습니다.
강남 집을 두고 지나치게 논의가 전개된 느낌이 있습니다만, 자신의 삶을 보다 넓고 그리고 긴 시간에서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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