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1세대 작곡가 손목인(1913~1999)선생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8.25 18:28 수정 2019.08.25 18:28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작곡가 손목인(1913년 출생)선생은 작곡가 박시춘(1913년 출생)선생과 더불어 대표적인 1세대(1世代) 작곡가선생님이다.
일제 때 서울 중동고보(중동고)와 일본 동경의 동경고등음악학교(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다(1936년). 작곡가 손목인 선생님은 성격이 명랑 쾌활한 분이라고 부인 오정심(2013년 당시 86세)여사가 증언했다. 아코디온의 명연주자며 농구선수였다. 주옥같은 가요 천 여곡을 작곡하셨다.
손목인 선생은 1952년 ~ 1957년까지 5년간을 도일(度日)하여, 일본에다 한국의 혼을 심었다. 손목인 선생은 음악세계가 딴 작곡가에 비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손목인 선생님의 가슴이 따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치하의 우민 정책에 굴하지 않고, 손목인 선생은 고등교육(대학교육)을 받은 식민지 조선의 희망인 것이다.
손목인 선생이 1세대 작곡가로서 우뚝 선 것은 첫 작품 ‘타향살이’(1934년)였다. ‘타향살이’는 나라를 잃고 팍팍하게 사는 이 땅 민초(民草)들의 고달픈 삶이었다. 가수 고복수선생도 ‘타향살이’(1934년)로 단방에 홈런을 날려, 가요계에 우뚝한 가수가 됐다. 실제로도 가수 고복수 선생은 키가 184cm로 당시(일제)시대로 봐서는 대단한 장신이었다.
손목인 작곡가의 제2탄(彈)은 ‘목포의 눈물’(1935년)로, 이난영(이옥례)을 조선제일의 여가수로 만들었고, ‘목포의 눈물’은 조선 망국노들의 절찬을 받는 애향가가 되기도 했다. ‘사막의 한’(1935년)은 ‘타향살이’로 히트한 가수 고복수를 더욱 확고부동한 저명가수로 굳혔다. 해조곡(1937년)은 손목인 선생이 이난영에게 지급한 제2탄으로 이난영을 더욱 확고한 여자가수로 다졌다. 해조곡은 양상포 작곡으로 되어 있는데, 양상포는 손목인의 필명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수박행상(수박타령)’(1939년)은 유머러스한 생활노래다. ‘바다의 교향시’(1938년)은 아방(이 땅) 최초의 해변가요다. ‘뗏목 이천리’(1942년)는 압록강의 뗏목을 노래한 시다. 청노새 탄식(1938년)은 식민지 조선인의 고달픈 삶을 읊었다. ‘아내의 노래’(1952년)는 남편을 죽음의 땅 최전선에 보낸 아내의 절절한 마음을 잘 나타낸 노래로 명가수 심연옥이 불렀다. ‘슈사인 보이’(1952년)는 피난지 부산의 거리풍경을 코믹하게 노래했다.
‘모녀기타’(1964년)는 영화의 주제가로 곡조가 애절하다. 인기가수 최숙자가 불러 히트했다. ‘카스바의 연인’은 손목인 선생이 도일(1952년~1957년)한 시절의 애절한 뒷골목여인이야기다. ‘마도로스 박’(1964년)은 저음가수 오기택의 대표곡이다.
‘아빠의 청춘’(1965년)은 ‘아빠의 청춘’이란 영화의 주제가다. ‘아빠의 청춘’은 가요로서도 흥겹지만, 영화도 흥행에 성공했다. ‘짝사랑’(1937년)은 가을의 정서를 잘 나타냈다. ‘타향살이’(1934년) ‘사막의 한’(1935년) ‘짝사랑’(1937년)이 가수 고복수를 불멸의 가수로 우뚝 서게 했다.
작곡가 손목인 선생은 업무계약을 위해 1999년 부인 오정심 여사와 일본 도쿄를 방문했는데, 심장마비를 일으켜 음악인생을 마감했다.
손목인 선생은 가셨지만, 선생이 남기신 천 여곡의 멋진 가락은 이 땅의 공간과 민초(民草)들의 가슴에 영생할 것이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