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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가 못풀 비밀(의문)은 없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9.02 20:09 수정 2019.09.02 20:09

김 시 종 시인·자문위원
국제PEN 한국본부

인생살이 같이 불공평한 것은 지게에 도시락을 잔뜩 지고 요기를 해가면서 찾아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자기 삶이 순탄한 삶이든지 역경이든지 자기 복(福)이다. 필자는 태어나서 78세가 되도록 늘 고난에 직면하고 있다.
나는 내가 처한 역경을 불평 없이 수용하고 역경(위기)을 기회로 만들곤 했다.
어려운 문교부실시 중등준교사 자격고시검정(출제 서울사대교수·서울사대교수채점) 역사과를 1969년에 응시하여 첫 응시로 바로 합격하여 경북도교육청실시 중등교사 임용고시 역사과에 중등역사 교사자격증 소지자 36명이 경쟁했는데, 3위로 임용고시를 합격하여 1970년 3월 1일자로 문경군 가은중학교 역사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중등준교사 응시료는 300원이었다. 나는 300원(당시 돼지고기 2근값)으로 4년제 대학졸업 자격을 획득한 셈이다. 중등교사 고시검정 합격자 전공과목 실력은 1류대(서울大) 수준이지만, 학교현장에선 평가절하를 예사로 하여 교육현장에서 알게 모르게 비하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실력을 연마했다.
한 평생을 중등교육에 바쳐도 승진이 보장되지 않는다. 특히 1978년 산북중학교에서 주임교사 임용을 불공정하게 하여 여러 번 하소를 했지만 외면을 당하여 익명으로 질의서를 냈다고,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시말서를 써야했다.
제자교육을 위해 바쳐도 평생을 평교사로 산다는 것은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살이가 허무하고 너무 물렁한 것 같아 뭔가 단단한 것이 없는가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돌(수석)이 단단하다는 걸 깨닫고 토요일 오후와 휴일에는 수석채취를 위해, 강(내)에서 살았다. 땡볕도 찬바람도 마다않고 1970년 후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십 여년을 돌밭을 밟았다. 강변의 돌밭에는 들풀도 같이 살고 긴 짐승(뱀)도 자주 찬조 출연했다.
처음에는 돌보는 눈이 석맹(石盲)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담치 돌로도 못쓸 잡석도 수석으로 착각하고 집까지 낑낑대고 날랐다. 수석선험자의 조언(助言)과 모범수석 수장가 댁을 자주 찾아다녀 나도 모르는 새  당당한 수석전문가가 되었다. 수석채집 십 여 년에 그럴듯한 수석도 십 여점을 거머쥐는 행운도 잡았다.
내가 수석을 자주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고 산북중학교 제자(중학생)중에도 자기가 아끼는 수석을 헌증한 제자가 두어명 있었다. 산북면을 흐르는 금천(錦川)에서 건진 소형 산형석(山形石) 1점을 선사받았다. 빚깔은 푸른색의 청석(靑石)인데 흰줄이 물결모양을 이루고 있는 앙증맞은 돌이었다. 수석을 선사한 제자에게 내 시집(창맹의 입)을 한권 선사했다.
수석(청석 산형석)을 선사 받은지 어느덧 43년이나 됐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을 선사한 제자 이름을 알 수 없어, 내 인생에 중대한(?) 의문이 하나 생겼다. 나는 집념이 강한 편이라 남들은 엄두 못 낼 과제를 쉽사리 여러 건을 거뜬히 풀었다. 해결에는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청석 산형석’을 선사한 제자의 이름이 안수익군(씨)임이 우연한 기회에 밝혀졌다.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안경희 여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제자 안수익군의 스승을 위하는 지난날의 고마운 마음이 지금 생각해도 너무 기특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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