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홍콩사람들의 정체성 위기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9.08 18:44 수정 2019.09.08 18:44

김 수 종
뉴스1 고문

요즘 3개월째 이어지는 홍콩시위를 보면서 ‘정체성’(正體性)이란 단어를 생각하게 된다. 영어로는 ‘identity(아이덴티티)’다.
국어사전에서 정체성의 뜻은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갖는 독립적 존재’이다. 알 듯 모를 듯 어렵다. 오히려 영어 ‘identity’의 의미, 즉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구별되는 개인 또는 집단의 성질’이라는 풀이가 조금 더 구체적이다.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바라봐도, 홍콩 시위가 심상치 않다. 직접적인 시위의 도화선은 송환법 반대라지만, 홍콩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 같다. 홍콩의 정체성 문제는 1997년 홍콩의 중국반환 이후 홍콩사람들이 자신들을 중국 국민으로 느끼지 못하는, 또는 중국 국민이 되고 싶지 않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홍콩은 19세기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로 생긴 도시지만, 150년 동안에 걸쳐 중국의 유교문화와 영국의 자유방임 기업정신이 교직된 국제도시로 발전했다. 즉 홍콩인들은 법의 지배, 자유, 민주주의, 자치의 가치관을 녹여낸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홍콩인들은 같은 중국인 피를 갖고 살지만, 공산당일당체제 아래 사는 본토인들과는 달리 서구식 자유주의체제에 익숙한 사람들인 것이다. 한마디로 홍콩이 중국의 일부로 소속된 그 순간부터 홍콩 사람들은 정체성의 문제를 안게 된 것이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일국이제(一國兩制) 정책에 의해 반환 후 50년 동안 ‘홍콩인에 의한 홍콩 통치’를 영국에 약속했다. 대만통일까지 염두에 둔 덩샤오핑의 원모심려(遠謀深慮)였다. 중국은 홍콩의 국회격인 입법회 구성은 선거제이나 내치(內治)를 책임진 총리격인 행정장관은 중국공산당이 임명한다. 중국본토와는 달리 홍콩은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치안, 경제, 인권, 언론 등에서 자유와 법치의 가치를 누리는 반자치 체제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홍콩 통치에 꾸준히 개입을 강화해왔고 시진핑 집권 이후 홍콩 정치 장악은 더욱 심해졌다. 송환법을 뒤에서 조종한 것이 이를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2014년 홍콩시민들이 행정장관 직선을 요구하며 벌인 우산시위는 민주주의 가치 회복을 위한 운동이었다. 2047년이면 홍콩은 본토와 같이 완전한 중국 공산당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다.  
식민주의를 끝낸 홍콩반환의 상징적 분위기로 인해 홍콩인들의 정체성 의식은 희석되는 듯했지만 이번 송환법 반대 시위를 계기로 “나는 중국인인가, 홍콩인인가?”는 정체성의 문제가 크게 대두된 것이다. 홍콩시위가 벌어진 지난 6월 홍콩대학이 시민 1015명을 전화 인터뷰한 조사 결과가 지금 홍콩인들의 정체성의식을 설명해 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응답자의 53%가 자신들을 ‘홍콩인’이라고 생각했고, 11%가 ‘중국인’으로 인식했다. 23%가 ‘중국안의 홍콩인’으로, 12%가 ‘홍콩의 중국인’으로 15%가 정체성의 혼재된 성향을 보였다. 1997년 홍콩반환 당시 같은 조사에서 ‘나는 중국인’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20%였던 것에 비하면 중국인 정체성은 절반으로 감소했다.
“중국 국민이 된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지느냐?”는 질문에 71%가 ‘노(no)’라고 대답했고, ‘예스(yes)’라고 답한 사람은 27%였다. 흥미로운 것은 18~29세 청년층의 90%가 ‘노’라고 응답했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태어나거나 자라난 청년 세대가 ‘중국인이 아니라 홍콩인이다’라는 인식이 강한 것이다.
이런 조사결과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홍콩 젊은이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숨김없는 의식의 표출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최근 송환법 반대 데모 주모자로 체포됐던 조수아 웡(黃之鋒) 데모시스토 사무총장의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가 의미심장하다. ‘1997년 홍콩반환은 식민지 족쇄를 푼 것이지만 홍콩은 되살아난 제국에 넘긴 것은 재(再)식민지화를 뜻하는 것이다. 중국이 민주주의 사회였다면 반환에 대한 이런 논쟁은 없을 것이다’
며칠 전 캐리 람 행정장관은 그렇게 완강하게 버티던 자세를 버리고 송환법 철회를 선언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행정장관 직선제 등 다른 4개 항목의 요구를 주장하며 데모를 계속할 뜻을 전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G-2체제를 이룰 정도로 경제적으로 강해졌다. 22년 전 중국에 반환될 당시 홍콩의 경제력(GDP)은 중국의 20%였고 1인당 국민소득은 중국의 35배였다. 그러나 당시 세계 7위였던 중국경제는 지금 세계 2위가 됐으며 홍콩의 경제력은 이제 중국의 4% 정도다.
경제 지표로만 보면 홍콩인들이 중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만한데 홍콩인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740만 명 홍콩인과 14억 중국인 사이에 놓인 정체성의 경계선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