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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명시조 3편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09.30 19:44 수정 2019.09.30 19:44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1. 옛 동산에 올라/이은상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옛 시인의 허사(虛?)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던져 짚고 산기슭 돌아나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드는구려.
(1928. 6. 11. 노비산)
<덧 말> 길게 안 따져도, 참된 시인은 최상의 애국자다. 나라를 잃고, 자기 고향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망국 백성에게, 따듯한 노래(시)를 들려주어 민초들의 삶의 끈을 이어준 것이 노산 이은상 선생같은 애국시인이다. 위의 시에서 옛 동산은 일제에게 망한 우리나라요, 베어진 큰 소나무는 항일운동을 하다 처절하게 죽어간 애국지사를 떠올려준다.
지팡이를 힘 있게 짚고, 애달픈 산을 밟아보니 사태가 져서 넘어져 죽은 소나무 밑에는 솔방울이 떨어져 새 솔이 나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을 이은상 시인 선생님은 발견하고 있다.
강인한 우리 민초들은 넘어진 자리에서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새 희망을 창조한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2. 봄처녀/ 이은상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옷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 오시는고,
임 찾아 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 볼꺼나.
(1925. 4. 18.)
<덧 말> ‘봄처녀’는 이은상 시인이 스물두살의 청년시인 때 봄날 들길을 거닐다 지은 즉흥시다. 봄을 봄 아가씨로 의인화했는데 비유가 뛰어나고 생동감 나게 형상화했다. 세계 명시 중에도 봄을 봄 처녀로 비유하여 이렇게 실감나게 우아하고 멋지게 지은 시는 지게에 도시락을 잔뜩 지고 여러 날 헤매도 만날 수가 없는 명시(名詩)중 명시(名詩)다.
시를 잘 지을 능력을 못 갖춘 이는 잘된 시를 아껴주는 마음이라도 가져야 한다.

3. 개나리/ 이은상
매화꽃 졌다하신 편지를 받자옵고
개나리 한창이란 대답을 써 보냈소.
둘이 다 ‘봄’이란 말은 차마 쓰기 어려워서.
<덧 말> 1920년대 초창기 조선 문단에서 이렇게 재치 있게 표현했다는 것은 천재시인이 아니면, 흉내도 못 낼 일이다.
노산 이은상 시인 선생님은 생전(生前)에 필자에게 ‘시(詩)’는 글은 짓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말을 짓는 것이라고, 자주자주 깨우쳐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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