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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외팔이 춘희(椿姬)와 수로가(水路歌)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10.09 17:54 수정 2019.10.09 17:54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내가 지난 70년대, 80년대 참여시를 즐겨 썼던 것은 젊은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한 얄팍한 꼼수가 아니라, 한없이 온유하면서도 불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강직함이 내게 있었다. 그것은 경김(경주 김씨)의 생래적 장점이기도 했다.
철권통치를 하던 7,80년대에 겁 없이 참여시를 즐겨 썼지만, 시의 최신식 무기인 비유를 시에 활용했기 때문에 국립호텔에 강제 수용되어 관식을 먹는 일은 없었다.
7,80년대 통치자도 그렇게 무지막지한 화상들은 결코 아니었다. 못마땅한 통치를 시로 까더라도 직설적인 욕설을 않고 시에서 비유기법을 활용하면 문제시 하지 않는 미덕도 있던 것 같다.
평소 뾰족한 정의감도 없이 살면서도 많은 문인들 중에 사고(필화)를 내어 두각(인기)을 드러내고 싶어 섣부르게 붓끝을 휘두르다가 자기 붓끝에 자기가 다친 사람을 여럿 보았다. 참여시든지 서정시든지 기본적으로 시에는 서정이 있어야 하고 기법으론 비유와 상징이 있어 예술로 형상화되어야 한다.
나의 경우는 역사학도(중·고교 역사교사)가 되어 현실의식이 자연스럽게 예리해 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시(참여시)를 발표할 때마다 특별히 대우해주시던 양식 있는 평론가 선생님께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내심(마음속)으로 고맙게 생각했지만, 감사전화를 한통도 드린 적이 없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월평(月評)에서 지적은 별로 없고 격려가 많아, 월평(月評)을 읽은 애독자들이 필자에게 친절하게 알려 주셨다.
지금까지 발표한 시를 월평(月評)에 올려 주신 평론가·시인이 백 명도 넘지만 비교적 초기와 나의 30대 40대 초반의 주요한 6건을 제목만 간단히 선보여 드린다.
아울러 참여시 2편(외팔이 춘희/수로가)도 곁들인다.

● 김시종 시평(詩評)
① 1970년 8월호 현대문학 시월평 ‘낙과’(신석초 중진시인)
② 1972년 3월호 월간문학/ 시문학 시월평(백승철교수/성춘복)
③ 1975년 1월호 월간문학 시월평 ‘도로고’ ‘낙법’(신경림시인)
④ 1980년 6월호 이달의 명시(名詩) ‘외팔이 춘희’(여성동아)
⑤ 1975년 2월 28일 동아일보 시월평 ‘수로가’(김우창교수)
⑥ 1985년 12월 20일 동아일보 ‘문화의 빛’을 찾아 시인 ‘김시종’(이시헌 동아일보 편집부국장 취재)
● 1990년 ~ 2019년 현재 생략(방대한 내용.지면관계)

1. (시) 외팔이 춘희(椿姬)/ 김시종

밤 거리에 서면
그 광장(廣場)에 불던 흙바람.
아직도 부네요.

회오리는 내팔과 처녀를 앗아 갔어요.

나의 오른 팔은
4월의 광장에 썩고 있어요.
내 나이 올해 서른 다섯.
청춘을 방목한지 장장 17년이나 됐죠.

한 팔의 포옹(抱擁)은 매력이 없어
개점휴업상태랍니다.
빛나던 사자 가죽은
저자에서 대낮에 도적맞고,

진구렁을 포복(匍匐)하며
독주도 마리화나도 두루 익혔죠.

내 몸은 시궁창처럼
밤 낮 없이 썩고 있어요.
빛나는 정금(正金)도
세월 속엔 똥이랍니다.
나의 지체중
여태껏 거룩하게 사는 것은
그 광장에 버려진 팔뿐이어요.

이 어둠속에서도 반짝이는 건
잃어버린 저항의 팔뿐이어요.
(1977년 신동아 4월호)

2. (시) 수로가 水路歌/ 김시종

귀 막아도 석면으로 귀를 막아도
수로부인을 내놔란
외오침이 곧잘 들린다.

수로부인을 풀어달란 외침은
밖에서 들리는 게 아니라
어쩜 용왕의 내면에서도
스스로 큰 소리 치는 것이었다.

일만어족을 거느리는
짐(朕)의 위세로서도
뭇입(衆口)은 불감당이로구나.
창맹의 입은 항문보다도 더러운지고.
수로부인을 내놔라! 내놔라!
용왕은 되려 소리에 붙들린다.
이글이글 진노가 치솟을수록
용왕은 대중속으로 침몰한다.
(1975년 시문학 3월호)

<덧말> 재미있었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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