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어머니들은 갖가지 모양의 황금빛 유기그릇에 맛깔나는 음식을 담아 가족의 안녕을 기원했다. 가볍고 편리한 생활식기에 비해 무겁고 관리가 힘들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유기그릇 한 벌 만큼은 장만했으면 하는 바램과 아낌없는 욕심을 부려왔다. 유기그릇에는 가족의 건강과 정성이 가득 담겨 있다.
요즘도 가끔식 황금빛 유기를 사용하는 식당을 갈 때면 왠지 맛도 더 특별하고 반가움도 배가 되는 듯한다.
예로부터 놋그릇을 만드는 사람을 ‘유기장’이라 한다. 구리에 아연을 넣은 주동으로 만드는 유기를 ‘주물유기’라 하고, 아연대신 주석을 넣은 향동으로 만드는 유기를 ‘방짜유기’라 한다.
방짜 유기는 질이 좋고 독성이 없어 식기, 수저, 양푼, 대야, 징, 꽹과리 등을 만드는데 쓰이며, 주물유기는 방짜보다 가격이 싸고 독성이 있어 촛대, 향로, 화로와 같은 일반기물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방짜유기는 섭씨 1600도의 용광로에 구리 78 : 주석 22로 합금해 두들기고 찬물에 담금질을 반복해 만든 것으로 휘어지거나 깨지지 않고, 다른 유기에 비해 광택이 뛰어나 인기가 높았다.
우리나라에서 방짜유기가 사용된 것은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주석의 비율이 규격화돼 좋은 품질의 방짜 그릇이 생산됐고 상류층에서 쓰던 유기가 일반인에게도 널리 보급됐다.
봉화 신흥리에서 처음 유기가 제작된 것은 18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곽씨와 맹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에 들어와 유기를 제작하면서 마을이 크게 번성해 새로 흥한 마을이라는 뜻의 ‘신흥리’로 불렸다고 한다. 1920년 전후에는 봉화유기마을에서 생산된 유기가 전국 유기 수요의 70%를 차지할 만큼 번성 했다고 한다.
봉화유기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백두대간의 양백지간에 위치해 춘양목이 생산되는 고장으로 쇠를 녹이는데 필요한 숯 생산이 용이했으며, 신흥리 마을앞에는 낙동강 700리의 발원지인 내성천이 사시사철 흐르고 1급수의 맑고 깨끗한 물은 제련시 우수한 유기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봉화는 지리적으로 경북 북부에서 강원도와 동해안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서 보부상 활동이 왕성해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 무엇보다 봉화의 장인들은 백두대간의 기상과 정기를 이어받아 성실하고 집념이 강해 장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이 투철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번성했던 봉화유기도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때 유기그릇까지 군수품으로 약탈되면서 생산기반이 약해졌고, 60년대 들어서는 연탄을 사용하는 가구가 늘면서 유기그릇 표면이 아황산가스로 의해 까맣게 변색되는 데다 때마침 스텐인레스 그릇, 양은 그릇, 플라스틱 그릇이 등장하자 봉화의 유기공방들도 대부분 사라지게 됐다.
쇠퇴의 기로에서 봉화의 유기가 다시 맥을 잇게 된 것은 1970년대 중반 봉화유기의 3대 고(故) 고해룡 유기장과 좀 더 늦게 시작한 내성유기의 김선익 유기장 덕분이다.
현재 봉화유기는 벌써 1대 창업주 고창업, 2대 고해룡, 3대 고태주까지, 내성유기는 1대 김용범, 2대 김대경, 3대 김선익, 4대 김형순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행정기관에서는 봉화유기의 보급을 위해 이들 두 장인들을 1994년 경북도 무형문화재 제22호로 함께 지정했으며, 2015년에는 봉화유기와 내성유기를 경상북도 향토뿌리기업으로 지정하고 맞춤형 경영컨설팅과 제품 및 포장디자인 개발 등을 지원해 명품 장수기업으로 육성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에는 경북도의 지원을 받은 경일대의 경북노포기업지원단은 봉화의 유기의 특성을 살려 얼음과 살균이 동시에 가능한 유기아이스 제품을 개발했으며 한국기초조형학회 국제전시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아 유기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유기그릇은 따뜻한 음식은 오랫동안 따뜻하게, 차가운 음식은 오랫동안 차갑게 유지하고, 더욱 정성스럽고 가치있게 한다.
엄태항 봉화군수는 "조상들의 슬기로운 지혜로 찾아낸 방짜유기의 신비한 효능을 현대의 웰빙과학에 접목해 모처럼만에 마련된 봉화 유기 부흥의 기회로 만들어 건강도 지키고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보탬이 되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봉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