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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놓친 보물을 되찾은 큰 기쁨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11.11 19:40 수정 2019.11.11 19:40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필자(나)는 국민학교 의무교육실시 첫 번 수혜자로 1948년 9월 3일 당시 문경군 호서남면 호서남국민학교에 만6세(집나이 7세)에 1학년에 입학했다. 대한민국 건국(1948년 8월 15일) 얼마 뒤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우리집(모전2리=중신기)에서 학교까지는 거리가 3.2킬로미터나 되었고, 입학하기 전에 한 달 이상 병을 앓아 제 발로 걸어가지 못하고 어머니등에 업혀 첫 등교를 하게 됐다. 다행히 같은 학교에 큰 누나 5학년, 둘째 누나 4학년으로 우리 3남매가 다 한 학교에 다녔다. 호서남국민학교 1학년 때 큰 누나와 같이 등교를 하여 큰 누나가 든든한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입학한 이듬해 우리마을(중신기)에 점촌국민학교가 신설되어 우리집에서 학교 등교가 5분이면 충분했다. 당연히 점촌국교로 전학하여 점촌국민학교 2회 졸업생(1954년)이 되었다. 점촌국교 3학년 때 6·25사변(전쟁)이 터져 6학년 때(1953년 7월 27일 휴전성립)휴전이 성립됐다. 휴전반대 데모에도 몇 차례 나갔다. 휴전반대 노래를 당시 점촌국교 유성준교장선생님이 직접 풍금을 치면서 가르쳐주셨다. 필자는 솔직히 교장선생님의 열정에 감동을 먹었다.
필자는 문경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문경중학교는 문경군에서 첫째가는 지역 중심학교일뿐 아니라, 경북북부에서도 명문중학교여서 입학시험 경쟁률이 5:1이었는데, 필자는 당시 12세로서 입학성적은 합격자 240명중에 상위권 1/3에 분포하여, 넉넉하게 입학이 되어 문경중학교 7회 졸업생이 되고, 문경중학교 3학년 때는 당시 최대부수(8만부)를 자랑하던 월간잡지 ‘학원(學園)’에 내가 지은 유머가 3번이나 뽑혀 이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소년이 되고 급기야는 중앙일간신문 신춘문예당선시인이 되었다.
우리 인생에 우연이란 없다. 우연이 필연이 되는 것이다. 문경중학교 입학하기 전에 점촌국민학교 2회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식장에서 외아들이던 나는 우등상과 개근상을 받게 되어 홀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우등상 상품은 ‘한영사전’(계몽사)을 받았고, 1년 개근상 상품은 고시조집(대양출판사→학원사)이었다. 읽을거리가 없던 그 시절에 즐겨 그 책 고시조집에 실린 59편의 고시조를 다 외우다시피 했다. 고시조집이 몇 십 년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오늘(2019년 11월 5일) 우연히 재발견되어 나를 감격케 했다.
반가운 고서(古書) 고시조집에 실린 지난날 애송(愛頌)하던 고시조5편을 본문(本文)이라도 적어 애독자와 일체감을 이루면 더욱 뜻 깊을 것 같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고사리)도 하는 것가
아무리 푸새엿 것인들 그 뉘 땅에 낫더니
- 성삼문/사육신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 양사언/조선전기 명필

미나리 한 포기를 캐어서 씻우이다
딴 데 아니아 우리 님께 바치나이다
맛이야 긴치 아니커니와 다시 씹어 보소서
- 유희춘/선조때 부제학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 이순신/조선구국성웅·軍神

묏버들 골라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홍랑/선조때 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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