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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뉴스 사회

갑술환국으로 수백 년간 잊혀졌던 '석각' 영양서 발견

전재춘 기자 기자 입력 2019.11.14 09:13 수정 2019.11.14 09:13

갈암 이현일이 건립한 ‘계정' 옆 바위서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이영재 학예연구사는 지난 12일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241전의 하천변에서 조선 중기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 이헌일이 건립해 벗들과 소요하며 ‘요산유수’의 삶을 실현했던 정자인 ‘계정’의 석각을 발견함으로써 갑술환국조선 중기에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맥을 이어 영남학파의 거두가 된 갈암 이현일(1627-1704)은 영산서원의 원장을 역임한 석계 이시명(1590-1674)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여중군자 장계향(1598-1680)의 둘째 아들이다.

갈암은 20대 중반에 들어선 1653년 부모가 낙토를 찾아서 보다 깊은 산속으로 은거를 선택하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하여 ‘수산유허비’ 부근에 ‘갈암’이라는 집을 짓고 19년 동안 거주했다.

갈암이 지은 ‘계정기’에 의하면 어느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신원천가를 걷다가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발견하여 그곳에 ‘계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바위에 두 글자를 석각했다고 한다.

기문과 문집에 의하면 갈암을 비롯해 석계 일가는 ‘계정’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닦으며 여가를 즐겼다고 함으로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선비들의 이상적인 삶이었던 ‘요산요수’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계정’에서 학문을 닦은 석계의 아들들이 모두 당대 학문으로 일가를 이뤘으며, 갈암의 경우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름에 따라 1672년 석계 일가가 수비를 떠난 뒤에도 그들의 유거지와 정자는 당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방문하고 싶은 지역의 명소였다.

하지만 1694년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에 인해서 시작된 갑술환국으로 인해서 남인계가 몰락하자 갈암 또한 탄핵되어 유배를 가기에 이르렀고, 1909년에 가서야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됨으로써 후손들에 의해서 ‘수산유허비’ 건립이 추진되는 19세기 중반까지 이곳은 잊고 있어야 하는 장소였다.

그로 인해서 1865년 후손과 후학들이 ‘수산유허비’를 건립함으로써 석계 일가가 살았던 유거지는 고증됐으나 갈암이 형제들과 학문을 닦고 소요했던 ‘계정’은 1931년에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서 이곳을 지나간 수산 김병종 (1870-1930)이 ‘세대가 오래 돼 초당과 계정의 위치를 알 수 없다[世代綿邈 草堂谿亭 無所指認]’라고 쓴 기록처럼 그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역사적 질곡으로 인해서 수백 년간 잊혀져야만 했던 갈암의 ‘계정’이 지난 5월부터 영양군 문화시설사업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산유거지 복원사업'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이영재 학예연구사가 지난 12일 ‘수산유거지’에서 동쪽으로 약 950m 떨어진 바위에서 ‘계정’이라는 석각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이영재 학예연구사는 “복원사업 용역을 추진하고 있는 안동대학교 산학협력단의 단장인 배영동 교수로부터 ‘현지인이 바위에 ‘석?(石?)’ 또는 ‘석계’라는 석각을 봤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인과 동행해 확인해 본 결과 그 석각은 갈암 선생의 정자가 있었던 ‘계정’이었다.”라고 발견 당시의 정황을 이야기했다.

군수 공약사항으로 선정해 취임 이후부터 '수산유거지 복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오도창 영양군수는 “수백 년간 잊혀졌던 갈암 선생의 정자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지역사의 발굴과 유거지 복원사업에 있어서 모두 대단한 중요한 성과로 이를 바탕으로 보다 실증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가 설정된 것이다”라고 ‘계정’ 발견의 의미를 평가했다. 전재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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