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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漢字로 보는 世上] 정중지와(井中之蛙)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12.15 19:10 수정 2019.12.15 19:10

배 해 주
수필가

우물 井. 가운데 中.  갈 之.  개구리 蛙.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뜻으로 식견이 좁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유사어로는 촉견폐일(蜀犬吠日),  월견폐설(越犬吠雪)이 있다.
중국에 왕망(王莽)이 전한(前漢)을 멸하고 세운 신(新)나라 말경, 마원(馬援)이란 인재가 있었다. 그는 관리가 된 세 형과는 달리 고향에서 조상의 묘를 지키다가 농서(?西)에 웅거하는 외효(??)의 부하가 되었다.
그 무렵 공손술(公孫述)은 촉(蜀) 땅에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외효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기 위해 마원을 보냈다. 마원은 고향 친구인 공손술이 반갑게 맞아 주리라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공손술은 계단 아래 무장한 군사들을 도열 시켜 놓고 위압적인 자세로 마원을 맞았다. 그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예 우정을 생각해서 자네를 장군에 임명할까 하는데, 어떤가?” 마원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천하의 자웅(雌雄)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는데 공손술은 예를 다하여 천하의 인재를 맞으려 하지 않고 허세만 부리고 있구나. 이런 자가 어찌 천하를 도모할 수 있겠는가’라고 판단했다.
마원은 서둘러 돌아와서 외효에게 고했다. “공손술은 좁은 촉 땅에서 으스대는 재주밖에 없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그래서 외효는 공손술과 손잡을 생각을 버리고 훗날 후한(後漢)의 시조가 된 광무제(光武帝)와 수호(修好)하게 되었다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옛날에도 우물안에 개구리가 있었지만 지금도 있다. 숲만 보고 멀리 있는 큰 산은 보지 못하는 근시안을 말한다. 그리고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탐한 채 큰 것을 놓치는 소탐대실의 형국을 일컷은 경우도 있다.
우물 안에서 밖의 세상을 모른 채 자아도취 된 자신만이 최고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국가 간의 간극도 자꾸만 좁혀져 간다. 지구별이 한 가족이 되어 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느 한 나라의 어려움이 그 나라의 어려움으로 국한되지 않고 인접국을 넘어 세계가 어려워지는 경우를 경험하고 있다. 바로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물 안의 개구리는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구상의 많은 독재자가 그랬다.
아프리카의 독재자, 중남미의 독재자, 그리고 지구상의 마지막 분단국인 북쪽의 북한이 그렇다. 변화하는 시대를 따르지 못한 채 밖으로의 문은 닫은 채 오롯이 우물 안에서 자신만이 최고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 아픔의 세월이 어언 60년이 넘었다. 글로벌 시대의 쇄국은 패국이 된다는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왕조를 꿈꾸는 어리석음에 젖어 있다.
이런 상태가 계속 이어진다면 더 깊은 외톨박이 신세가 되어 버릴 것이다. 문제는 독재자보다 그 치하에서 살아가는 선량한 국민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버렸다. 외부 문물을 접할 수 없으니 그곳이 천국이고 유일한 낙원으로 느끼고 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가?
어쩌면 독재자는 닫힌 문을 열지 않아도 자신과 그의 일가는 호의호식 할 수 있기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크게 보면 독재자도 그 아래 있는 국민도 모두가 닫힌 문 속에서 아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은 진리가 있다. 그것은 영원이란 없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우물 안에서 나올 수 있길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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