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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점촌(店村) 촌놈이 앉아서 시민(市民)되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9.12.23 19:05 수정 2019.12.23 19:05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필자(나)는 일제 치하인 1942년 1월 14일, 당시 문경군 호서남면 모전2리 5번지(속명 중신기)에서 태어나, 지금은 문경시 점촌1동(모전4동 23-2)에 살고 있다. 모전4동은 속명이 상신기다. 한평생을 거의 모전동에서 살고 있는 모전동의 지킴이요, 터줏대감인 셈이다.
촌놈인 호서남 면민에서 도회지로 이사도 않고, 제 자리에 앉아 문경시민이 됐다. 미련도 한 몫 볼 때가 있다. 1970년 가을부터 모전4동(상신기)에 솥을 걸고 살고 있다. 점촌(店村)은 1830년에 상주진(병영)에서 나온 옛 지도에 점촌(店村)이름이 보일 정도록 유서 깊은 고장이다.
문경시청 문화예술과 엄원식 계장님의 주문으로 좀처럼 짓지 않던 애향시 ‘상신기’를 며칠 전에 지었다. 지역인사들도 한번 읽어 주시면 더욱 고마울 것 같다. 애향시 ‘상신기’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상신기는(모전4동)

웃담 새터(上新基)는
중담 새터(中新基)(모전2리)에 딸린 조그만 마을이었다.

웃담 새터(상신기)에는
나와 점촌국교 한반인
김창수와 유대식이가 살았다.

키가 나보다 배는 큰 왕주먹 김창수!
사철 맨발인 유대식이가 80지경인 내게 어제일인 듯 떠오른다.
왕주먹 김창수는 1954년 3월 점촌국교 2회 졸업식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몇 해 전 뒤늦게 소식을 들었는데
점촌국교 졸업 후 몇 년 안 되어,
농암장터 왕주먹에게 끝장이 났단다.

사철맨발 유대식이는 착실하게 살아
늘그막에 문경대상도 받고 보람도 컸다.

웃담 새터, 상신기는 해방직후 미군이 담배 수납소에 주둔했고,
미군이 떠난 자리에 6·25전쟁 중에는
880부대(10경비 중대)가 주둔하여,
문경일원의 잔비(공비), 이삭을 주었다.

점촌장터가 석탄경기가 좋아
활활 타오르자,
웃담 새터 상신기가 본동 중담새터(중신기) 모전2리를 벗어나,
모전4리로 분동하여 새 행정구역을 이뤘다.
상신기(모전4리)에는 나와 문경중 동기인 조상규학형이
삼양라면 창업에 동참하여,
국내최초의 삼양라면을 개발하여,
맛이 삼삼한 삼양라면을 계발하여,
삼양회사의 필수요원(주역)으로 한국식품업계의 샛별이 되었다.

초기 상신기(웃담 새터)는 가난한 민초들이
점촌에 살러 오면 임시 거처가 되는 빈동이라서,
주막이 한집 건너 있고,
주모들의 젓가락장단이 골목을 울렸지만,

지금은 점촌동에서 제일 큰 애드인 맨션아파트가,
점촌의 마천루로 흰 구름 모자를 쓰고 멋을 부린다.
뒷산 돈달산이 끼어들어 키를 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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