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일어난 달로 이를 기리기 위해 6월 6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각 시·군별로 현충일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날이 있다. 바로 1926년 6월 10일 일어난 6·10만세운동이다. 6·10만세 운동은 일제에 맞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3대 민족운동 중 하나로 평가되는 독립운동으로 3·1운동 정신을 계승하고 완전 독립을 목표로 1926년 6월 10일 순종인산일(장례식)을 기해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제 합병과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자주독립 의지를 밝힌 독립 만세운동이다.
순종의 장례식 날인 6월 10일, 상여가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날 때 '독립 만세'함성 소리와 함께 격문 천여 장이 뿌려졌고, 천도교와 학생단체, 조선공산당 연합으로 시작된 6·10만세운동은 삼엄한 일제의 감시와 통제로 3?1운동처럼 전국으로 번지지는 못하였으나 다시 한 번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확인시켜 주었던 독립운동이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제시했던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이나 광주학생운동에 비해 시위 규모 면에서는 크지 않았는데, 이는 7년 전 3·1운동에 놀랐던 일제가 순종이 승하하자 기마경찰과 헌병, 사복경찰로 철통같은 경계와 감시를 펼쳐 일반 민중의 시위 참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만세 시위가 크게 일어나지는 못하였지만, 국내외 민족운동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다양한 독립군 단체의 통합과 결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또한 6·10만세운동은 학생이 독자적인 민족운동 주체로 부상하면서 이후 학생운동 조직이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 민족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학생운동 역량의 성장 위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그 자체의 규모보다도 이후 민족운동의 질적변화에 큰 계기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61·0 만세운동은 단순히 특정한 사건을 넘어서,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 번 드러낸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이 운동을 통해 학생들은 독립운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하였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은 이 시기를 거쳐 더 큰 규모로 확산되었다. 특히, 1920년대 후반의 독립운동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민족적인 운동으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1945년 광복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고 푸른 잎들이 그 빛을 더해가는 6월이다. 6월을 맞아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정신과 그들의 희생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