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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가 찾던 사진 한 장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12.26 14:53 수정 2016.12.26 14:53

선친(先親)께서 결혼한 것은 1930년대 초반으로, 혼례식을 올리는 것은, 신부(新婦)집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예식을 올렸다. 서울의 행세하는 집을 빼고는, 시골에서는 결혼예식을 올려도, 결혼식 기념 흑백사진 한 장도 찍지 못하는 문화실조(文化失調)가 심각했다. 요사이는 사진 찍는 것이 워낙 쉬워져서,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백일(百日)사진이 보편화가 됐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1941년 7월 14일(양력) 이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꼭 반년 뒤인, 1942년 1월 14일(양력)에 내가 태어났다. 나는 아버지 얼굴을 70대 후반이 되도록 까맣게 모르고 있다. 아버지 생전에 사진을 한 장도 남겨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외아들로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망극한 한(恨 )을 지닌채 살고 있다. 선친의 직장동료나, 학우(學友)들께 부지런히 탐문했지만, 말짱 허사였다. 막말로 산소를 발굴하여, 유골을 맞추어, 데드마스크(Dead Mask)를 제작하고 싶은 극단적인 생각도 해봤다. 생전에 아버지를 뵈었던 육촌형님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물어 봤더니, 거울속의 내 얼굴과 닮았다고 명쾌하게 알려 주었다. 나는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천부적(천재적) 소질이 다분함을 자타(自他)가 공인(共認)한다. 초등학교(점촌초등)2학년(1949년)때 담임선생님을 모습과 행적은 여실(如實)하게 기억하는데, 선생님 존함은 아무리 묻고, 찾아도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나와 점촌초등학교 2학년 때 한반이던 서경수(徐京洙) 학우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엘리트라며, 이름은 알 수 없고, 김 선생님이라고 했다. 김선생님은 옆 반 선생님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기악(器樂)솜씨가 뛰어나, 풍금으로 못 치는 노래가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도 있는 법. 나의 꾸준한 김선생님 탐구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평소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이인환 퇴임초등교장 선생님이, 김선생님의 절친한 초등교육계의 동료였다. 이교장 선생님은, 제 설명을 들으시고, 그 선생님은 김성태(金性泰)선생님으로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나오셨고, 1949년 1학기 때 점촌초등학교를 퇴직하고, 단기육사(短期陸士)에 입교(入校)하여, 소위로 임관(任官)이 됐고, 고속 승진하여, 1951년 강원도 횡성전투에서 김성태 소령(당시 대대장)은 전 대대원과 함께 중공군 포로가 되어, 1개 대대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고,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끝내는 굶어죽고 말았다. 당시 북한포로수용소는 포로에게 하루 두 번, 삶은 옥수수 한 종지만 주어, 목숨을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김성태 소령은, 어리던 내 소견으로도 차분한 교사보다 우락부락한 군 지휘관이 적격인 것 같았는데, 뜻도 못 펴시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김성태 선생님(소령님)의 자초지종을, 선생님 이름도 모르던 학우들에게 알려주니, 그제야 맞다. 그 선생님 그 때 참 못됐었다고 혀를 찼다. 김선생님은 딴 초등교사들 보다 음악 실력이 월등한 것은, 당시 계성고등학교에는 박태준 작곡가(오빠생각/동무생각작곡)가 음악교사로 계셨기 때문이라 본다. 학생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최고의 행운이다. 김선생님 숙제도 거뜬히 풀었고, 이제 나에게 남은 숙제는, 선친(우리 아버지)의 행여 있을지도 모르는 사진을 찾는 일이다. 점촌동에 있는, 점촌시민교회에서 몇 해 년, 교회창립70년사(史)를 펴냈는데, 주요사진자료가 실려 있었다. 1941년 1월 5일에 찍은 사진인데, 교회중직(간부) 장년교인 유년(아동)주일학생까지 일일이 사진의 얼굴을 짚어보니, 120명 정도가 되었다. 당시 선친도 점촌시민교회에 다니셨다고 한다. 당시 그 교회 교인으로, 지금까지 생존해 계시는 이덕호 장로님께 선친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선친이 아마 이분일 거라며, 얼굴이 작은 왜소한 어른을 가리켰다. 그 순간 나는 몸이 짜릿했다. 평생 얼굴도 모르던 우리 아버지를 사진 속에서나마 찾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무엇과 비하랴. 이 분일 거라고 증언하던 이덕호 장로님께 세월이 너무 오래 되어 확실한 자신이 없다고 하셨다. 그나저나 나는 이덕호 장로님이 선친으로 지목한 사진을 확대하여 아버지 얼굴을 확실히 아는 안산의 큰누님에게 보냈더니, 아버지는 생전에 키도 컸고, 얼굴도 복스럽게 생겼다며, 사진의 얼굴은 딴 사람이다 했다. 이 정도에 이른 것도 하느님의 은혜라 믿는다. 생전에 아버지가 그들을 보았고, 그들도 예배당에서 우리 아버지를 보았을 것 이다. 아버지와 같은 시대의 같은 교회 사람을 보았으니, 얼마나 반가운가. 내게 1941년 1월 5일 시민교회 전교인사진은 백만원짜리 수표보다 소중하다. 이 사진을 코팅하여 가보급(家寶級)만 모아두는 앨범에 소중하게 보관하기로 했다. 요사이 이 땅은 생지옥이다. 증오, 적대시, 성급한 단죄가 활화산보다 뜨겁고 참혹하다. 정객에겐 가장 중요한 것은, 대권의 탈취가 아니라,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올곧은 정치가는 사람(국민)을 아낄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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