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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잊어선 안될, 그러나 잊혀져 가는 6·25 격전지 ‘김천’

김철억 기자 입력 2020.07.05 16:11 수정 2020.07.13 09:29

북한군 전진기지 김천, 융단폭격에 시가지 폐허
김천시 부항지서 망루, 증산 전몰경찰 충혼비
지역 민관 힘 모아 북한군 공격 저지
충혼탑 6·25 참전용사, 1795位 위폐 봉안

↑↑ 김천 부항지서 망루(복원).

↑↑ 등록문화재 405호 김천 부항지서.

↑↑ 부항지서 전투참전 기념비 제막식.

↑↑ 용파 사거리.

↑↑ 증산 전몰경찰 충본비 제막식에 참석한 유공자를 맞이하는 김충섭 김천시장.

↑↑ 현충일 추념식.

■김천, 공산치하 50일
집중포화에 시가지 80%이상 파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기습남침이 감행됐다.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와 한국군은 서울을 버리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한다. 그리고 6월 30일 한강 방어선도 철수하고 대전 방위를 위한 금강변에 방어선을 포진한다.
김천은 1950년 7월에 접어들면서 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7월 초 대전 방어를 위한 금강변 방어선이 무너지자 정부는 대전을 포기하고 대구로 이동했다. 공산군은 경부선을 따라 영동·김천을 거쳐 대구로 향했다.
김천의 각급 학교는 7월 초순에서 중순에 걸쳐 일제히 휴학했다.
7월 중순 남하하는 국군과 경찰은 김천 인근에서 공산군과 수 차례 전투를 벌였다.
7월 31일 김천 소개령이 내려졌고, 오후 11시에 마지막 경부선 열차가 왜관을 거쳐 대구로 갔다.
김천은 7월부터 약 50일 정도 공산군의 점령 아래 놓여 낙동강 전투에서 낙동강을 도하하려는 공산군의 중요 전진기지가 됐다. 8월 15일까지 대구를 함락시키고 부산으로 진격하려던 공산군은 낙동강 영천전투에서 크게 지고, 9월 15일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김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후 김천에서는 공산군 점령 아래 설치됐던 인민위원회 등 모든 기구들이 해체됐다.
김천시사(2018년 발간)에 따르면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공산군의 군사기관·행정기관이 김천에 주둔해 전진기지 역할을 했으며, 김일성이 김천에 왔다는 사실이 유엔군 정보망에 탐지돼 8월 31일과 9월 2일 두 차례에 걸친 전투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김천 시가지는 일시에 초토화됐다”고 전한다. 김천은 전쟁을 겪으면서 시가지지의 80%이상이 소실돼 폐허의 도시가 됐다. 김천은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정도가 전국에서 가장 격심했던 도시다.

■충혼탑 6·25 참전용사 1795位 위폐봉안
김천시 성내동 충혼탑에는 국가와 민족을 지키고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한 故 이종호 소령 외 1794위(位)의 호국영령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매년 현충일 행사가 거행되는 충혼탑은 1962년 최초 건립됐으며, 민선자치 이후 1998년 현재의 모습으로 재 건립됐고 2010년 10월 20일 주변정비사업을 실시해 현재 지역 순국선영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부항지서 망루
부항지서 망루는 콘크리트 망루와 지서를 연결하는 터널, 적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나무울타리로 견고하게 구축됐으며, 6.25 전쟁 기간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도주로가 차단된 북한군들이 백두대간에서 활동하던 빨치산과 합류해 1000여 명 규모의 불꽃사단을 조직해 아군 군·경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곳이다.
당시 부항 면민들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별동대(60여 명)를 창설해 2차에 걸친 북한군의 부항 지서 공격을 물리치고 삼도봉 일대에 은신하고 있는 다수의 북한군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특히 1951년 10월 20일~21일까지 1000여 명의 적이 막강한 화력으로 공격한 2차 전투에서 경찰관 1명과 청년단원 4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총상을 당했으며 끝까지 지켜낸 역사의 현장이다.
2008년 10월, 6·25전쟁 관련 유적지로는 등록문화재 405호로 지정됐으며, 2013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6·25 전쟁 때 경찰이 운영한 망루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이다. 김천시는 2019년 부항망루공원에 6?25 전쟁 부항지서 전투에 참전한 경찰·의용경찰·청년단원 106명의 이름이 각인된 ‘부항지서 전투 참전 기념비’를 건립했다.

■증산면 소재지 일원, 북한군 토벌작전
6·25전쟁 당시 김천을 점령했던 공산군은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퇴하기 시작해 산악지대로 숨어들었다. 그 가운데 불꽃사단이라 부르는 공산군 3000여 명이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에 주둔하면서, 면 소재지에 있던 국군 제877 경비대와 잦은 전투를 벌였다.
1950년 10월 24일 자정 불꽃사단 일부가 증산 지서를 습격해 이기섭 경위를 비롯한 경찰관 6명을 사살했고, 11월 18일에는 경찰관 2명을 사살하고 도주했다. 이후 증산 지역에 주둔한 공산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인 국군과 경찰은 1950년 11월 24일 국군 제877대대와 경북도 특경대원, 의용 경찰 대원, 지방자체 특공대원 등 200여명이 합동으로 오전 4시를 기해 수도산에 은거한 공산군의 아지트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공산군 80명을 사살, 13명을 생포했으나, 국군과 경찰 50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보았다.
1951년 2월과 7월 14일 불꽃사단이 증산 지서를 재차 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청년단원 등 120여 명은 격렬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공산군의 피해도 컸으나 당시 임시 면사무소로 사용 중이던 쌍계사가 불타 소실됐으며, 공산군은 계속되는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 보급품 부족과 혹독한 겨울이 겹치면서 패퇴했다.
1995년 전사자 22명의 이름이 새겨진 충혼비를 건립했고, 2015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됐으며, 충혼비의 기단 균열, 탑부분 노후화로 김천시에서는 2020년 ‘증산 전몰경찰 충혼비’를 재 건립했다.
김충섭 김천시장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부항지서 전투참전 기념비’와 ‘증산 전몰경찰 충혼비’를 건립한 것은 참전용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 그리고 숭고한 정신과 용기를 기억하고 그에 대한 감사와 예우를 다하기 위한 것이다”면서, “이를 통해 6·25전쟁의 의미와 교훈을 되새기는 한편, 국가안보를 더욱 굳건히 하며, 평화통일에 대한 의지와 염원을 결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철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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