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눈물의 꽁보리밥을 아시나요?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2.08 14:59 수정 2017.02.08 14:59

포항시 양학동의 ‘양학프라자(목욕탕) 헬스장’에는 60-70대를 주축으로 한 ‘보리밥조’가 있다. 건강을 위해 헬스 후 아침마다 죽도시장으로 이동 된장을 곁 드린 조찬보리밥을 먹는 것이 그들에게는 하루 일과의 시작이다.목욕 동아리형태로 조직원간에 정을 나누고 향수를 만끽하며 살아가는 정보를 나누는 보리밥 애호가들의 오랜 단체로 명성이 나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보리밥예찬가들이다. 꽁보리밥고개의 역사를 따져보면, 그 보릿고개는 뭐래도 우리 겨레한테는 말 그대로 단장의 눈물고개였다.배가 고파 창자가 끊어 질 정도로 힘 들든 그 고개를 1960년대 말 무렵 겨우 넘어섰던 한민족의 아픈역사다. 그것도 민주화세력이 욕을 하던 군사독재 덕분이었다. 보릿고개는 참으로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요즘 젊은이들은 바로 그 아버지, 어머니가 삼사십년 전 넘었던 그 보릿고개를 엉뚱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옛날 청춘남녀들이 그 고개에 있는 보리밭 속에서 그렇고 그런 짓을 하던 곳쯤으로 매우 낭만서럽게 생각하고 있다. 어린이들은 또 그 나름으로 동화의 백설공주가 흰 뭉게구름을 타고 둥실둥실 넘었던 높은 마루턱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우리들한테는 예로부터 슬픈 사연이 맺힌 고개들이 너무나 많았다. 손가락을 꼽아보면 울고 넘던 박달재도 그렇고 한 많은 미아리 고개나, 임이 넘던 아리랑고개도 그렇다. 모두가 임을 떠나보냈던 고개들이었으니 한스럽고, 원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게다.어쨌거나 사랑하는 이들한테 이별의 대명사였으니 썩 정감이가는 어휘다.아무리 박달재를 울고 넘었더라도, 아리랑고개를 넘다가 발병이 났더라도 그건 배부를 때의 이야기다. 보릿고개만은 낭만은커녕, 배가 고파 넘어지고 엎어지며 넘던 서러운 한(恨)의 고개였다. 옛말에도 무슨 서러움, 서러움해도 배고픈 서러움만한 게 이 지구상에는 없다고 본다. 오늘날 바로 50대 사람들이 그런 고개를 넘고도 살아남은 모진 사람들이다. 지난날 운동권학생 거의가 사회 밑바닥, 가난한 집 아들딸들이였다. 가진자들에 대해서는 저주도 많았다. 그들의 이념이나 사상이 왼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일이였다.군대에서도 먹을거리는 충족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굶지 않기 위해 용약출진(勇躍出陣), 입대하던 사람들도 많았다.우리는 60년대 그 무렵만 굶었던 게 아니었다. 역사교과서엔 우리 백의민족은 예로부터 예의 바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만 적어 놓았지, 자자손손(子子孫孫)그 오랫동안 보릿고개를 가까스로 넘겨 살아남았다는 말은 한 줄도 없다.그렇다면 보릿고개는 어떤 고개였던가? 30~40년전만 해도 시골 사람들은 부농 몇 집을 빼고는 한마을 모두가 봄철이면 굶주렸다. 가을에 거둬 들인 곡식을 한겨울 파먹고 나면 음력 2월쯤엔 달랑달랑해진다. 기다릴 데라곤 이제 보리걷이 밖에 없다. 그 기다림이 길면 넉달, 짧으면 석달, 형편 따라 달랐다. 이때부터가 보릿고개의 시작이다.이 고개를 넘는다는 것은 그 방법이 실로 너무나 슬펐다. 아침엔 온가족이 해가 하늘 가운데 떠 있을 때 일어난다. 바로 점심때다. 아침과 점심 겸으로 꽁보리밥 한 주발을 개 눈 감추듯 후딱 때운다. “보리밥먹고는 뛰지 말아라!” 옛 어른들의 가르침이다.저녁에는 멀건 보리죽 한 사발을 단숨에 마시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잠을 자면 몸을 움직이지 않아 에너지를 아낄수 있다는 지혜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잠이 금방 오는 것도 아니다.그 결과가 어린이의 대량생산이다. 그렇게 진절머리 나던 보리밥 원조식당이 전국 곳곳에 퍼져있다.즐거움도, 슬픔도 옛것은 다 그리운 건가. 요즘 산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팍팍한 세월 당당하게 이겨보자고 짜낸 지혜가 고작 보릿고개의 꽁보리밥 이야기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