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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곡의 개 서낭당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1.08.26 18:36 수정 2021.08.26 18:36

김 시 종 시인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남쪽 삼천포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혜산진에 이른다는 3번 국도를 따라, 점촌 버스터미널에서 6㎞북쪽으로 달리면 사백여 호나 되는 큰 마을이 있으니, 바로 유곡(幽谷)이란 동네다.
유곡은 옛날부터 영남의 주요 역(驛)으로 찰방이 배치되어 인근의 여러 역을 관할했고,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다. 조용한 느낌을 주는 유곡이라는 마을 이름과는 달리 항상 번화한 마을이었다.
대개 서낭당은 호젓한 오솔길 옆이나 외진 곳에 있기 마련인데, 유곡 서낭당만은 국도변에 있는 게 특징이다. 유곡 서낭당이 말목고개에서 현재의 장소로 옮겨진 것은 1908년이라고 한다. 서낭당 큰 느티나무는 손가락 굵기의 가는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 지금은 둘레가 두 아름 반이나 되는 거목(巨木)이 되었다.
1970년에 서낭당에 불이 나서 반소(半燒)되어 외관이 초라했는데, 그나마1986년 7월 25일에 완전히 철거하고, 서낭당 신위(城隍堂 神位)라고 새긴 비석을 당집 대신 세워 놓았다.
사람도 조반석죽으로 겨우 연명하던 시절이라 개는 하루 두 끼 얻어먹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이 하루 세 끼 식사를 하는 요사이도 개의 점심은 없을 때가 많다. 사람을 잘 따르는 개는 주인을 따라 바깥나들이를 곧잘 했다. 주인이 자기 집 개가 따라오는 것을 꾸짖거나 때리면, 일시 집으로 돌아가는 척하지만 개는 얼마간 거리를 두고 주인을 배행할 줄 알았다. 주인을 따라 잔칫집에 가서, 요기를 한 경험이 있는 개는 주인이 갓만 써도 주인의 뒤를 따를 준비를 했다.
옛날 유곡에 어떤 늙은이가 살았다. 노인은 집에서 개를 한 마리 길렀다. 여느 집의 개처럼 이 개도 주인을 잘 따랐고 주인의 웃고 성내는 것을 가릴 만큼 영리했다.
유곡의 인근 부락인 불정(佛井) 마을 어떤 집에 회갑 잔치가 있었다. 노인은 이른 아침부터 잔칫집을 찾았다. 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배행했음은 물론이다. 잔칫집에 가는 것은 경사를 축하해 주는 뜻도 있었지만,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노인은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쉬지 않고 먹고 마셨다.
해가 지자 날씨는 추워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던 노인은 너무 취하여 엎어졌다가 가까스로 일어나고, 일어났다가는 엎어지곤 하다가 말목고개에 이르러 넘어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추운 겨울바람이 술로 상기된 얼굴을 때려도 노인은 코만 드르렁 드르렁 골았다. 얼어 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영리한 개는 주인이 바깥에서 자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았다. 개는 주인의 옷을 물고, 필사적으로 흔들어댔지만 주인은 죽은 듯이 움직일 줄 몰랐다. 혀로 얼굴을 핥고, 꼬리로 코를 간질여도 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개는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 이르니, 마침 마당에 큰 아들이 서 있었다. 개는 막무가내로 주인 아들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밖으로 끌고 갔다. 드디어 노인이 쓰러진 곳까지 주인 아들을 끌어 오는데 성공했다. 한참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던 주인 아들은 개의 영리한 행동에 탄복하고, 언 땅에 쓰러져 체온이 식어가는 아버지를 부리나케 업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노인을 아랫목에 눕혔을 때, 아들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아랫목에 한참 누워 있던 노인은 비로소 눈을 뜨고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노인이 동사(凍死)를 면한 것도, 개의 기지(機智)로 말미암은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뒤 개는 주인 식구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지냈음은 쉬이 짐작이 갈 것이다.
나이가 많아 개가 죽자, 주인집에선 마치 가족 중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슬퍼했고, 개 무덤까지 만들었다.
무덤뿐 아니라 유곡(幽谷)의 의구(義狗)는 부락의 수호신인 서낭신으로 승화되어 기림을 받게 되었다. 의구(義狗)를 서낭신으로 한 서낭당은 유곡에서 얼마 안 되는 말목고개에 세워졌다.
지금도 유곡에서는 음력 정월 보름에 의구를 서낭신으로 한 서낭당에 온 마음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치성을 드리며, 음력 정월부터 사월까지 의구를 기리는 마음으로 보신탕을 먹지 않는 것이 마을의 불문율(不文律)로 되어 있다.
유곡 동민들은 의구를 생각하며 진작부터 일정한 기간 동안이나마 보신탕을 먹지 않는 문화인의 효시가 되었다고나 할까. 유곡에 의구 서낭당을 옮겨 세우고 나서부터는 마을에 도둑이 일체 들지 않아 개서낭의 영험에 주민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의구 서낭당에 제사와 치성을 극진하게 드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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