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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눈 내리는 날에....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3.03 15:18 수정 2017.03.03 15:18

눈 오는걸 무척 좋아하는 층은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들이나 개다.필자는 아이 때나 지금이나 눈 오는 날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며칠 전(2월22일) 아침 눈발이 흩날렸다. 눈 오는 날 외출을 하면,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한다. 올해 설 이튿날 설산(우산)을 쓰고, 골목길을 걷다 꽈당! 하며 M정형외과에 가서, X-ray를 찍었지만 다행히 골절상은 아니었다.며칠 전 눈 내리던 날은 더욱 조심했다. 눈이 적게 와서 다행이었고, 더욱 다행한 것은 흩날리는 눈발을 타고 추억이 달려와, 가슴을 짜릿하게 하는 서정시‘눈 내리는 날’을 즉흥시로 지었는데 길이는 17행(줄)으로 내가 읽어도, 얼굴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린다. 눈을 타고 온 추억은 몇 해 전 돌아가신 육촌형님인 구원형님 얘기다. 구원 형님은 살아 계신다면, 우리나라식 나이로 88세가 된다.나보다 12살 위로, 띠 동갑이다.구원형님은 어려서 한동네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자주 들려서, 동생인 나에게 재미나는 옛날이야기를 한 자루씩 들려주었다.별 내용도 아니었지만, 입담이 좋은 구원형님이 얘기를 하면, 재미가 거저 그만이었다. 별것 아닌 식자재를 갖고도, 갖은 맛을 다 내는 엄마의 음식솜씨 같았다. 구원형님이 21세때, 6.25사변이 일어나, 인민군(의용군)에 끌려갔다가 9월 후퇴때 탈출하여, 국군에 입대하여, 인민군과 싸우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국군에서 제대하고, 철도역 전기분소에 취직을 하여, 착실하게 근무하시다가, 정년퇴임을 맞으셨다. 구원형님은 직장생활을 하시면서도, 우리집에 더러 오셨는데 그 때 마다 형님은 한 번도 빈손으로 오시지 않고 장작 한 다발을 잊지 않고, 챙겨 주셨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26세요절) 돌아가신 우리 집 식구들은 겨울나기가 난감했다.먹을 것(쌀)도 없고, 땔감(장작)도 없어, 고생이 막심했다.구원형님이 장작 한다발을 가져오신 그 날 밤은 모처럼 냉돌이던 아랫목이 따뜻했다. 무거운 장작을 메고 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잘 안다. 어렵게 사는 아지매(당숙모)와 동생(재종제)을 위한 따뜻한 배려와 동기애의 발휘였다. 구원형님은 한 평생 올곧게 정성을 다 하셨지만, 노년은 자식 때문에 평탄하지를 못했다. 힘이 되어 주지 못한 동생(재종제)으로 송구스런 마음뿐이다.구원형님은 형수님과 같이 경기도 이천 호국원에서 한겨울에 눈 이불을 덮고 긴 잠을 주무신다.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사람은 살 동안 인정(人情)을 남겨야 한다. 필자는 구원형님 같이 마음이 따뜻한 재종형을 두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나는 친형님이건 친동생이건 남자형제는 없기 때문에, 육촌형님인 구원형님이 가장 가까운 형님이다. 칡덩굴로 묶은 장작 한다발. 구원형님과 나를 형님 동생으로 더욱 단단히 묶어 준 것 같다. 어려선 옛 날 이야기를 들려주어, 상상과 행복을 더해 주었고, 학창시절엔 장작 한다발로 마음의 그늘을 녹여 주었던 구원(九原)형님! 아무리 생각해도 휴매너티가 넘치는 너무 멋진 형님이다.귀신은 경문(經文)에 막히고, 사람은 인정(人情)에 막힌다. 오늘날 우리나라·우리사회가 비정(非情)만이 절규하는 것은, 따뜻한 인정(人情)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 정(情)이 없으니, 생지옥일수 밖에 없다. 정치계와 사회 모든 방면에 가슴이 따뜻한 사람, 마음이 올곧은 리더가 나타나서, 광야(사막)와 같은, 각박한 현실을 탈출하여, 가나안(오아시스)으로 안내할 정직한 리더는 없는가! 하늘이여, 절망한 이 땅 국민에게 모세보다 뛰어난 영도자를 보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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