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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재수 없던 날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3.24 13:40 수정 2017.03.24 13:40

내가 세계 최고시인으로 엄지손가락을 내준 시인은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드 시백(詩伯)이다. 워즈워드 시인의 무지개(가제)의 시구(詩句),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는 세계 최고의 절창(絶唱)이다. 아주 잘된 세계적 영화‘수선화(水仙花)’에는 워즈워드와 여동생‘도로시’가 등장한다. 둘은 ‘오뉘’라기 보다 가장 이상적인 연인같다. 도로시는 오빠 워즈워드에게 시적 영감 자체다.워즈워드의 시업(詩業) 대성(大成)은 누이 도로시의 격려가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세계적 영화‘수선화’를 다시한번 보고 싶지만, 도무지 기회가 오지 않는 걸 어쩌랴. 영국에만 워즈워드와 도로시 남매가 의로운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시인 김수영과 누이 김수명 여사가 있다.김수명 시인은 청교도적 자유주의자로 젊은 시인들의 우상 자체다. 누이 김수명 여사는 최장수문학잡지‘현대문학’의 초창기와 전성시대의 편집장으로, 어떤 남자 편집자도 따를 수 없는 실력과 마인드를 갖춰, 현대문학의 성공신화를 창조한 바 있다. 현대문학 명편집인으로 영명을 날리던 김수명 여사는 여든이 훨씬 넘었지만, 요절한 오라버니 김수영 시인의 문학적 완성을 위해 일류출판사(민음사)에서 김수영 시전집을 내고, 김수영 문학상이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했다. 몇 해 전에 서울 노원구에 김수영 시인 문학관이 개설되게 하여, 목하(目下)눈부시게 운전되고 있다.일류시인이 되려면 누이동생을 잘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내게는 누이동생이 없지만, 쉽게 절망할 수는 없다.내가 문학작품(?)을 공식적으로 투고, 입선한 것은, 1950년대(1957년) 당시 국내 최고일간지던 동아일보가 발행부수가 고작 5만부였는데, 중·고등학생 잡지인 월간‘학원(學園)’은 8만부나 팔려, 당시 6.25직후 어려운 경제사정에도 ‘학원’은 좋은 의미로 독불장군이었다.학원에 당시, 홍길동전(정비석) 얄개전(조흔파)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박계주) 만화 코주부 삼국지(김용환) 만화 꺼꾸리군 장다리군(김성환)등 인기 읽을거리가 실려, 학원이 발매되기 3일전부터 애독자들이 서점앞에 줄을 섰다. 소설가 정비석선생은 ‘학원’에 소설 홍길동전을 연재하여, 원고료 수입으로 서울 중구 양동에 양옥을 사고, 한국 문인 최초로 승용차를 굴렸을 정도다.학원은 인기 있는 연재물 말고도 학원 독자들을 위해 배려한 ‘학원문단’은 당시 한국 문단보다 활기를 누렸다, 독자들이 투고한 매월 오,륙백편의 작품을 심사하여, 십편(10)이내의 작품을 입선과 가작으로 뽑았다. 산문의 경우, 입선 3편은 작품이 학원문단에 실리고, 가작7편의 경우, 작품명 작자명 주소가 실렸다.경쟁률도 쌔고, 도전하기가 보통 용기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내 경우는 산문 첫 투고(첫번이자 마지막)를 한 것이, 1957년 2월26일 문경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당시 4월초)전인 3월 초순에 이발소를 다녀와서 기분이 상쾌하여 지은 것이, 산문(꽁트) ‘재수 없던 날’이었다. 나는 글을 짓는 것보다, 원고 지정서가 더 어려웠다.글씨가 뛰어난(?) 졸필(拙筆)이 되어, 인내심을 갖고 읽으면 내용이 꽤 쏠쏠하지만, 내용도 안보고 글씨만 본다면, 작품을 읽기도 전에 휙! 던져버리기 일쑤다. 내 졸필을 커버할 대안(對案)도 있긴 했지만, 글씨를 잘못 써도, 자필(自筆)을 고집했다. 1957년 학원 6월호에 내가 첫 투고한 ‘재수 없던 날’이 가작으로 뽑혔다. 심사위원은 여류소설가 최정희 선생이었다. ‘재수 없던 날’은 내가 이발관에서 본 국민 학교동기 구두닦이 소년 박용서 이야기였다.어찌보면 너무 숱한 글감 같지만, 나는 어려서(15세)부터, 사회정의 실현에 관심이 깊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학원문단 가작입선(1957년)이후, 십 년 만에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1967년)하여, 지난 날의 소년문사(少年文士)가 기성시인이 되었다, 나와 같이 그 달 학원에 뽑힌 동래중의 이기태 학생(입선작 장마)은 나중 경찰청장이 되었고, 가작에 걸린 보성중 조해룡(조해일) 학생은 197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하여 명명(이름)을 드날리는 유명작가가 되었다.그 무렵 ‘학원’의 학원문단 산문부 가작으로 이화여중학생 오혜령의 이름이 단골로 보인다. 오혜령은 연세대 영문학과 오화섭교수의 따님으로 공부선수로도 유명하다.연세대 입학성적은 전교 차석(2등)이요, 졸업성적은 수석(1등)을 마크했다. 1965년과 1966년에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혀, 어엿한 희곡작가가 되었고, 방송인으로도 이름을 드날렸다.오혜령의 후일담은 생각한다. ‘학원’은 1959년에 불황으로 은퇴 공연을 했지만, 학원문단에 입선하여, 후일 한국문단에 오른 이는, 1백5십명을 헤아린다. 나도 단 한번의 투고로 영예로운 학원문단출신 문인(시인)으로 등재됐다.‘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위즈워드의 시구처럼 15세 소년(아이) 김시종은, 25세(어른)에 기성시인이 된 것이다.워즈워드 시백(詩伯)은 똑소리 나는 대시인(大詩人)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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