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사설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길’완전봉쇄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3.24 13:41 수정 2017.03.24 13:41

일본‘역사 지우기’…“도 넘었다”일본‘역사 지우기’…“도 넘었다”

다카시마 공양탑은 일제강점기 다카시마 탄광에서 강제노역하다, 죽은 조선인들의 유골 매장지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위패가 불타, 개개인의 인적 사항은 확인할 수 없다. 2015년 9월, MBC 에서 한국 서경덕 교수와 함께 다카시마 공양탑을 찾아간 모습을 방영함에 따라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방영 당시 다카시마 공양탑은 수풀에 뒤덮인 상태로 전혀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이후 서경덕 교수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마련한 비용으로, ‘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길’을 정비했다.일제강점기 당시에 일제는 침략전쟁을 위해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공사장이나 광산 등에 집단 동원했다. 특히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면서, 10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을 징용했다.이들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채, 탄광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45도 이상의 갱도에서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는 열악한 노동 환경, 영양부족, 질병, 탄광사고 등으로 많은 조선인이 사망했다.하시마 탄광의 경우도 혹독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감옥 섬’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2015년 다카시마 탄광을 포함한 규수(九州)와 야마구치(山口) 지역 근대화 산업유산 시설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시켰다.이 같은 역사의 현장으로 가는 길을 일본이 완전히 봉쇄했다는 것은, 그들의 침략행위를 지우겠다는, 도가 넘는 역사지우기일뿐이다.다카시마 공양탑 가는 길을 지난해 초 나가사키 시에서 임시 폐쇄하여, 큰 논란이 됐다.이번엔 가는 길이 완전히 폐쇄됐다고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팀이 지난 23일 밝혔다.서 교수는 작년 초에 방문했을 때는 공양탑 가는 길 입구에 긴 밧줄로 느슨하게 묶어 ‘위험’이라는 안내판을 걸어 놨다.네티즌의 제보로 다시 확인해 본 결과, 이번에는 큰 나무막대 3개를 단단히 설치하여, 아예 사람들이 들어가기 힘들게 막아 놨다. 급조해서 만든 안내판 2개를 아예 동판으로 바꾸어, 영구적으로 폐쇄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 교수는 길을 폐쇄하고 안내판을 설치한 나가사키 시에 지속적으로 연락하여, 누구나 공양탑을 방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을 요청했다.나가시키 시는 인근 사찰인 금송사(金松寺)로 모든 유골을 다 이전했다고만 주장했다. 금송사 측에도 연락을 하여, 모든 유골이 다 이전된 게 맞느냐고 재차 확인했다.미쓰비시 측이 정확히 알고 있다고만 했다. 미쓰비시 측에 연락하면, 나가사키 시에서 알지 자신들은 잘 모른다는 답변만 반복했다.이에 대해 서 교수는 다카시마 공양탑에 묻힌 유골은 다카시마 탄광에서 죽은 징용자들,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하시마(군함도) 탄광 조선인 사망자의 유골을 공양탑으로 옮겨왔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밝혔다.무한도전 방송이후 한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고, 이런 강제징용 사실이 더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나가사키 시에서 공양탑 가는 길을 폐쇄한 것이다. 이는 강제징용 사실을 숨기려는 또 하나의 ‘역사왜곡’이라고 비판했다. 서 교수는 올해 말까지 강제징용에 대한 사실을 안내판 등을 통해 알리고 있다는 것을 세계유산센터에 보고해야만 하는 일본 정부이지만, 유네스코 등재 후 지금까지 하시마 및 다카시마를 관광지로만 널리 홍보 중이라고 지적했다.역사의 현장은 금송사(金松寺)와 미쓰비시가 주고받는 말놀이에 있지 않다. 이 같은 말놀이는 ‘순환논리의 오류’일뿐이다.역사는 인위적으로 지울수록 드러나는 속성이 있다.그 당시엔 침략자인 일본으로썬 치욕의 역사를 당대가 반면교사로 삼아야한다.반면교사로 삼지 못한다면, 지금의 속셈에도 침략의 속내가 있다고 역사의 현장이 비난을 퍼부어도 해명할 길이 없을 게다. 일본의 비판적인 지성을 기대한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