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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지장보살로 승화한 구화산의 등신불

이승표 기자 입력 2022.05.08 15:27 수정 2022.05.08 16:26

이승표 남부취재 본부장


김교각(697~794)은 신라가 낳은 위대한 승려다. 승려이기 이전엔 그는 신라 33대 성덕왕의 장남이자 왕자였다. 속명은 중경으로 알려지고 있다.

스님은 신라 제32대 효소왕 4년 신라궁궐에서 태어났다. 서기 701년 스님이 4세 때 효소왕을 대신해 섭정을 하던 신목왕후가 암살된 몇 년 후 효소왕마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성덕왕(김흥광)이 즉위하게 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스님(중경)이 화랑이 됐을 때 후궁 문제로 친모 성정왕후와 아버지인 성덕왕 사이에 잦은 갈등이 이어지자, 이에 스님은 왕가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에다 왕실의 권력투쟁에도 환멸을 느낀 나머지 서기 721년 24세의 나이로 당나라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러나 스님은 왕실의 뜻과는 달리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해 버린다.

왕자의 신분으로 궁궐에서 좋은 옷 입고 유복한 궁중생활을 즐길 법도 했건만, 이를 마다하고 이국의 구중궁궐인 구화산으로 들어가 초막을 짓고 스스로 고행 길에 나섰다. 속세에 대한 부정을 중생구제로 대신하고자 했다.

배고픔과 외로움 속에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까지 모두 벗어 던지고 도를 향해 용맹정진 해야 하는 해탈의 길을 택한 신라왕자 김교각이 가는 길은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후에 스님이 되어 남긴 ‘수혜미(酬惠米)’와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이란 두 편의 한시에서 스님의 고행길을 잘 읽을 수 있다. 한시를 풀이한 것으로 대신 하고자 한다

‘수혜미(酬惠米)’에서 스님은 
"좋은 수레 버리고 베옷 걸친 뒤 바다 건너 도를 구하러 구화산을 찾아 왔다오.
나 본래 왕자의 몸으로, 수행의 길에서 오용지를 만났네.
가르침을 주는 것만도 고맙거늘, 이제는 이렇게 쌀까지 보내왔다네.
반찬을 준비하고 좋은 쌀로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고나니.
지난 날의 배고픔 모두 잊었네..."라고 적었다.
스님이 탁발에 나서 어렵게 쌀을 보시한 한 불자에게 감사를 담아 한 수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중국의 4대 성산(구화산,아미산,보타산,오대산)중의 하나인 구화산에 오르기 전 오대산을 먼저 찾았다고 한다. 오대산에 오르자 기이하게도 산이 한 자나 꺼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놀란다.

스님은 직감으로 여기는 자신이 머무를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다시 사방을 유유자적하던 중 구화산에 이르게 된다. 구화산의 구름 덮힌 아흔 아홉 봉우리의 수려한 절경에 반해 초당을 짓고 정진에 들어갔다.

정진에서 스님은 목이 마르면 산간 벽계수를 마시고 배가 고프면 산나물과 백토(속칭 관음토;식량 대용으로 쓰이는 흙)로 고행과 굶주림, 외로움을 이겨냈다. 스님의 고독함도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에서 묻어난다.

절집은 적막하니 네 집 그리웠겠지, 승방서 예 올리고 구화산을 내려가네.
대 난간 죽마삼아 타고 놀기 좋아하고, 절에서의 수행은 게을리 하더니.
물 긷다 시냇물 밑 달 건지기 그치고, 차 달이다 사발 속 꽃장난도 그만두고.
잘 가거라 동자야 눈물 자꾸 눈물 흘리지 말고, 노승에겐 서로 벗 할 안개노을 있단다.

스님은 절간에서 함께 했던 어린 상좌였던 동자승이 부모와 고향의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사를 떠나는 뒷모습을 쓸쓸히 바라본다. 자신의 타국에 대한 적막함과 고향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도 여기에 담고 있는 듯하다.

이 동자승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을 스님께서 구해준 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가 스님이 구해 준 자식이니 이제 내 자식이 아닌 불가의 자식이라며 스님께 맡겼다고 한다.

당시 김교각 스님을 찾아 치성과 향을 올리는 선남선녀가 매일 천 명을 넘었다고 한다. 스님께서는 생전 중생을 지도한 뒤에야 보살과(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를 이루고, 지옥이 비지 않는 한 성불하지 않으리라고 맹세 했다니 참 승려의 진면목을 보게 한다.

스님의 제자들에 의해 전해지는 ‘지장보살님의 거룩한 맹세’에서도 자신의 득도(得道)보다 먼저 고단한 중생을 위한 보시와 구제가 우선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즈음 구화산 기슭에 살고 있던 산주(지주)인 민공(민양화)은,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아들(도명)의 권유로 스님을 친견하게 된다. 이 자리에서 스님의 설법에 감명을 받은 민공은 스님께 보시를 제의한다.

스님은 방문하는 불자들을 모두 받아드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땅을 시주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산주인 민공은 구화산 전체를 시주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재를 털어 절을 짓고 스님의 제자가 되어 죽을 때까지 아들과 함께 보필했다고 전해진다.

이같은 스님과 민공의 덕행이 황제의 귀에 까지 전해졌다. 이를 접한 황제는 절을 더 크게 중수하게 하고 절의 이름도 화성사(化城寺)로 명했다고 한다.

어느덧 스님도 세월이 흘러 극락의 문턱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서기 794년, 스님은 75년간의 수행을 마감하고 세속 99세에 열반에 들었다. 육신지장보살로 승화되어 구화산의 운무 속으로 홀연히 떠나신 것이다.

열반에 들기 전 스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죽거든 다비(화장)하지 말고 석함에 넣어 3년 뒤에 열어보고 썩지 않고 있거든 그대로 개금(금칠)하라”고 유언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3년 후 석함을 열어보니 스님은 정말 살아계신 듯 생생해 등신불(等身佛:사람을 넣은 불상)로 모시게 됐다고 한다.

불기2566년 4월 초파일(부처님 오신 날), 중생구제를 위해 왕가의 부귀영화도 버리고 부처님과 함께한 신라왕자 김교각 지장성사의 숭고한 공덕과 도량에 추앙이 더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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