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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64년만에 갚은 점심빚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4.07 13:36 수정 2017.04.07 13:36

세계에서 열두번째로 기림을 받는 우리글, 한글을 두고도 아직 한글은 한자도 안 끼어 넣고 순한문 투성이의 비가 세워져 비석만 가지곤 이 땅이 한국이 아닌 중국에 간듯하다.구태의연한 낡은 투의 한문(漢文)투성이의 비(碑)만 고집하는 것은 창의력이 없고, 청순한 감각이 없는 감각이 모자라고 시대에 뒤떨어진 우둔한 짓거리다.참신한 감각이 돋보이는 순 우리말 비석을 보면, 비석의 주인공이 슬기로운 후예를 둔 것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흔히 비문(碑文)은 이름난 학자나 문장가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은데, 학자보다는 이름난 문장가(文章家)에게 비문(碑文)을 맡기면 내용이 살아있는 생동하는 비를 세울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우리 문인중에 산 비문을 지은 어른은 대문호(大文豪)노산 이은상 선생이시다.충무공의 기념비나, 다른 인사의 비문도 이은상선생이 지은 비문을 보면, 손뼉을 탁 치게 하는 감동과 순발력이 용솟음친다. 필자는 운좋게도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 내 문학의 큰 스승이시다. 이은상 선생이 시(시조)와 산문의 대가(大家)이신데, 필자도 시와 문장(수필)에 정진(精進)하고 있는 터이다. 노산 선생님의 글(비문)을 받고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다.노산 이은상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 큰 은총을 받은 것이, 필자다. 행여 내게 비문을 청하는 이가 있으면 마다않고 화끈하게 한 수를 보여주겠다. 한국의 큰 기업 N·K는 박윤소회장이 맨손으로 창업하여 세계시장에 진출하도록 몸집을 불렸다. 박윤소 N·K회장은 필자와 초(점촌초등)·중(문경중)의 동기동창 학우다.지금부터 64년전인 1953년 봄(보릿고개때)에 당시 문경군 호서남면 공평4리에 있던, 점촌국교 6학년 1반에 다니던 박윤소네 집을 찾아갔다.나와 잘 어울리던 학급친구 여나뭇이 일요일에 윤소네 집을 찾았다. 1953년 5월은 6.25전쟁이 막바지 때 였고, 그 때가 절량기인 보릿고개로 힘겹게 살 때였다.반친구 여나뭇이 떼지어, 시내에서 십여리 떨어진 산골동네인 궝마 윤소네집을 불시에 찾아갔다.윤소는 맘씨도 좋고, 공부도 학급에서 상위권에 드는 모범생이요, 공부선수였다.윤소네집 뒷산에 올라가서 칡뿌리를 캐어, 허기(배고픔)를 때우기 위해셨다. 산 바로밑 윤소네 집 마루에서 잠간 쉬고, 짉뿌리를 캐러갈 요량이었는데, 넓은 툇마루에 앉아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고 말았다.이젠 더 주저할 것 없이 짉뿌리를 캐러 가기 위해 막 일어서는 참인데, 쌀밥을 고봉으로 차려놓은 떡!벌어진 밥상이, 동무들을 마루에 다시 주저 않게 해주었다.보리죽도 반가운 보릿고개 배고프던 그 시절…소반에 정성이 소복이 담긴 이밥 그릇들. 콩가루 묻혀 찐 파는 꿀보다 달콤했다.보리죽 반 그릇에도 감지득지 하던 춘궁기에, 열두·세살어린 손자 윤소의 글벗(학우)들을 흔쾌하게 식사대접하시던 윤소할배어른이 베푸신 푸짐한 밥상! 그 때 윤소할아버지께서 차려준 밥상 머리의 나는, 일흔 넘은 지금까지도 그 날 같은 진수성찬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윤소할배 박공 노숙장자 할아버님은, 문전옥답(門前沃畓)백마지기를 가시던 광작농(廣作農)으로, 고향마을 궝마(진곡)동민(洞民)들을 일가(一家)같이 알뜰살뜰 보살피셨고, 이웃마을 사람들까지 배고픈 이들이 없도록 뒤를 보살펴 주셨다한다.통크고 사랑많은 할배의 훈도를 받고 자라난, 박윤소 회장도 할아버지의 따뜻한 가슴을 닮아, 주식회사 N·K를 창업하여, 회사 임직원들을 아들같이 동생같이 살갑게 보살펴 주고 있다.박노숙윤소할배는 아흔두해를 적선(積善)하시다가, 천수를 다 누리시고 이 세상을 떠나셨지만, 손자 박윤소 회장의 가슴속에 지금도 살아 계신다.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박노숙할배(1898년~1988년)마냥 후한 인심(人心)을 남겨야 한다.생전에 송덕비를 극구 사양하셨지만, 박노숙 할배님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 맘에 송덕비로 살아계신다. 하늘이 단비를 고루솔솔 내리시듯 박장자(노숙)댁 쌀독인심이 온동네를 배부르게 하고 살찌우시게 했다. 64년전 윤소네집 툇마루에서, 구성지게 우는 뻐꾸기 소리를 처음 들었고, 뒷산에서 캥캥 우는 노루울음도 그날 비로소 들었다. 64년이 지난 76세의 박윤소 학우 김시종이 이글을 지어, 그 날의 점심값을 이제야 갚는다. 마음의 빚을 갚고 나도, 그 날의 빚은 고마움은 그냥 남은 듯 하다.박공 노숙장자 할배님의, 명복을 머리숙여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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