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코리아의 위기를 구해줄 그분 어데 계신가요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4.11 14:04 수정 2017.04.11 14:04

히틀러의 나치가 일어나 유럽을 온통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을 때 영국의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 달래기에 나섰다.“재발 이러지 마십시오. 세계가 소란해집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고 자라면서 자기의 성을 찾는 일조차 무척 힘이 들었을 뿐 아니라 미술학교 입시에도 두 번이나 낙방하여 무척 자존심이 상한 쓰라린 과거를 가진 히틀러는 대영제국의 귀족출신 체임벌린이 자기를 찾아 뮌헨까지 온 사실에 미소 지었다. 자만심이 상투 끝까지 올라갔다고나 할까. 그는 그런 만남의 배경이나 약속을 완전히 무시하고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심지어 벨기에, 네덜란드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문자 그대로 이것은 유럽의 위기, 더 나아가 자유세계의 위기였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가리켜 “그 사람은 신사가 아니다”라는 어처구니없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임하였다. 그 뒤를 이어 국왕으로부터 조각의 중대한 임무를 위임 맡은 처칠은 당장 조각에 착수하면서 1940년 5월 13일 의회에서 연설하였다. 그는 의회와 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처칠 영도하에 출범하는 새 정부는 광범위하게 인재를 등용하라는 것, 그리고 모든 정당이 다 참여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조각하고 있음을 알려주었다.그리고 의회를 향해 처칠은 비상사태를 맞이하여 자신이 취한 일련의 조치를 의회가 승인한다는 것과 새로운 정부에 대한 신뢰가 있다는 사실을 문서화하여 위회의 결의로 통과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본 의회는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연합된, 그리고 흔들림 없는 국민적 결심을 대표하는 정부의 구성을 환영 한다”라는 그 결의안은 통과되었고, 처칠은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악의 표본인 히틀러와 그의 나치를 박멸하기 위한 성스러운 전쟁에 전심전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이 연설에서 “나는 피, 수고, 눈물, 그리고 땀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한마디를 던진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국가를 이끄는 한 지도자의 진실을 느끼게 된다. 위기에 처한 민족을 살리는 한 지도자의 용감한 모습을 우리는 이순신 장군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을 코웃음 쳤던 조정이 일본의 침공을 예상하고 군비를 가다듬었을 리 없다.그런데 왜군은 1592년 부산항에 쳐들어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30만 대군, 정예 병사로 편성된 선봉대가 이미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휘를 받아 한국 땅을 밟았고, 한양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국가의 패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그러나 이순신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만단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오히려 소인배의 중상과 모략에 악용되어 충무공은 오랏줄에 묶여 재판을 받기도 하였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백의종군’을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그래도 조정에 유성룡 같은 어른이 있어 처형만은 면했다는 일설도 있다. 어쨌던 그가 원균으로부터 지휘봉을 이어받았을 때 왜군에 대항할만한 병력은 이미 없었다.겨우 사실을 알아내고 백의종군하는 장군에게 지휘봉을 맡기면서 우리의 힘이 약하니 일본을 상대해 크게 전투를 벌이지는 말라는 조정의 당부도 없지 않았다지만,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는 간단하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고 신하 이순신이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尙有十二 舜臣不死)”라는 짧은 한줄의 글. 그러나 그 속에는 위기에 직면한 조국을 건지려는 한 사나이의 굳은 의지가 스며있다.그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12척의 배를 가지고 수백척의 일본 배를 바다에 가라앉혔다.명량에서, 노량에서 일본군을 무찌르고 조국을 건졌다. 그가 “순신불사(舜臣不死)”를 외치지 않았더라면 오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위기에 처한 영국을 살린 처칠이나, 위기에 처한 조선을 살린 이순신이나 정신은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