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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햇두릅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4.21 12:20 수정 2017.04.21 12:20

내가 봄을 기다리는 것은, 봄꽃을 좋아하는 로맨티스트여서가 아니다. 봄이 되면 봄나물이 나온다. 나는 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봄나물인 두릅이 시장에 나오면 사기 위해서다.4월이 되기 무섭게 나는 하루 한 번씩 재래시장을 두리번거린다.봄나물의 대표선수인 두릅을 만나기 위해서다. 올해는 지난 4월 10일 점촌중앙시장에 두릅이 존안(얼굴)을 드러냈다. 내가 더러 찾는 장씨 아줌마 노점에서 처음 선보인 두릅 두 두름을 잽싸게 샀다. 여섯 두름을 꼭 사야했는데 나머지 네 두름을 내일 도착하면 사기로 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옮겼다.두릅 한 두름은 지난해와 같이 만원에 살 수 있었다. 사람이 세상에 살자면 혼자 힘만으론 온전하게 살 수 없다.다행히 고마운 분을 만나, 도움을 받으면 세상살이가 훨씬 수월하고, 이웃에 대한 고마움과 배려도 할 줄 알게 된다. 내가 중앙일보신춘문예에 당선하여 기성 시인이 된 것은 25세 때였다. 서울소재 문학으로 명성이 있는 대학을 나온 처지도 아니고, 그야말로 무사독학(無師獨學)한 독불장군(獨不將軍)이었다.당시(1960년대) 이름 있는 문예잡지는 단연 ‘현대문학’이었다. 내용도 참신하고 편집솜씨도 깔끔하여 매월 1만 7천부가 팔려, 수지채산이 맞고 집필자에게 원고료도 제 때 지불하여, 좋은 이미지를 쌓고 한국문학발전의 확실한 밑거름이 되어주었다.최고 문예지 현대문학의 임원은 조연현 교수(동국대)가 상근 주간이었고, 김수영 시인의 누이 김수명 여사가 편집장을 맡았다.김수명 편집장은 두뇌가 명석하여, 조영현 주간의 노고를 많이 덜어주었다. 망망대해에서 지푸라기 하나 잡을 여력이 없는 나에게, 배려심이 많은 김수명 편집장이 구명의 밧줄이 되어 주셨다. 등단(1967년)한 다음해부터, 현대문학에 내 작품을 고맙게 실어 주셨다, 등단 초엔 작품이 뛰어날 수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작품이 익어 가고, 1970년대의 문제작을 현대문학에서, 실어주셨는데, 현대문학 1972년 2월호의 ‘불가사리’다. 당시 극성스럽던 정보정치를 풍자한 참여시였지만, 비유와 상징을 적절히 구사하여, 김지하시인‘오적’처럼 필화는 일으키지 않았다. ‘불가사리’가 세상에 빛을 본 것도, 조연현 주간교수님과, 김수명 편집장님의 소신과 용기 덕분이라고 생각하며 뒤늦게 나아 감사를 드린다.꼭 밝혀야 할 것은, 내가 지금까지 칼럼과 수필을 이어온 것도, 조연현 주간님과 김수명 편집장님의 지극한 은총이라고 확신한다.현대문학 1969년 4월호에 수필 처녀작, ‘메리의 죽음’이 실렸다.남의 겹방살이(8년동안)만 하다 겨우 오두막 한 채를 마련하여 처음 기를 암캉아지 ‘메리’였는데 당시 어머니와 나, 단촐한 가정에서 ‘메리’를 기르게 되어, 퇴근길이 가벼웠는데, 어느 여름날 ‘메리’가 남이 놓은 쥐약을 먹고, 쥐 대신 죽고 말았다.‘메리의 죽음’이란 내 첫 수필을 읽어보면, 남 보긴 정이 없어 보여도, 가슴이 따뜻할 뿐 아니라, 다정다감하고 위트와 유머가 철철 넘치는 쓸 만한 젊은 남자를 발견 할 수 있다. 현대문학 4월호(1969년) 내 수필을 보고, 수필의 대가들도 내게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내가 정식 수필가가 된 것이 내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그 뒤 김수명 편집장은 현대문학을 그만 두시고, 조연현 주간교수님도 일본에 출장 가셨다가 급서하셔서, 몹시 애석했다, 나도 하는 일도 없지만, 바쁘게 살다보니, 지인(知人)과 은인(恩人)들게 내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 봄이 오기 무섭게 햇두릅을 사서, 은인께 내 봄편지를 보낸다.내가 계속 햇 두릅을 보내드릴 수 있도록, 은인께서도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나도 무너지려는 건강을 망치질하고, 보수하여, 내가 무정하고 배은망덕한 사람이 아닌 가슴이 따뜻한 사람으로, 은인에게 각인이 되도록 하느님께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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