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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향길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5.07 19:38 수정 2017.05.07 19:38

어머니는 마음의 고향이다.이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진실한 말씀이다.어머니 없는 고향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안 계신 고향은 , 껍데기 고향 일 뿐 진짜 고향이 될 수 없다.내가 어머니가 계신 고향을 떠난 것은, 1960년 11월 29일로, 이 날 나는 입영장정이 타는 야간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금릉군(김천시)의 추풍령을 넘었다. 벌써 55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늦가을 밤의 경부선 철로변의 단란한 초가집 풍경을 지을 수 없다.열린 방문으로 단란하게 저녁밥을 챙기는 한 가족의 단란한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밝은 전등불 밑에는 세라복(김천여고 교복?)을 입은 청순한 소녀모습이 인상적이었다.입소 첫 날의 장정수송호송열차에는 장정 수송중대 감독병사들의 불효령이 칼춤을 췄다. 어제까지는 자유인이었는데, 오늘부터는 교도소 죄수(?)보다 열악한 최말단 육군 졸짜로 추락했다.나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바로 차장옆의 단란한 초가집이, 회복해야 할 천국이었다.생전처음으로 외아들을 떼어 보내고, 돌아서 눈물짓던 어머니의 그 날 모습도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다.논산 육군 제2훈련소 26연대 12중대 5소대(선임하사 전병곤 병장)에서, 6주간 기본훈련을 마치고, 보병특과로 재분류되어, 영천 고경면 소재 육군부관(행정) 학교에서 병과 교육을 다시 6주간 받았다. 보병특과로 분류되자면 지능지수가 높아야 했다.우리소대 40명중, 보병특과로 분류된 훈련병은 나(김시종)와 다른 한명(김돈호)의 두 명 이었다. 나는 1961년 2월초부터 그 해 3월18일까지 육군행정병으로 병과교육을 받고, 육군의 최고 사령부인 육군본부 부관(행정)감실 요원으로 전속 특명이 났다.서울의 육군본부에서 근무한지 두 달도 채 못되는 1961년 5월 16일에 5.16군사 혁명의 새벽을 맞아 중대한 역사사건의 산증인이 되었다. 내가 이등병때 5.16이 일어나고, 6월1일자로 일등병이 되었다.최전방이 아닌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 육본에서 군복무를 하게 되어, 다행한 편이었지만, 바로 위의 고참병들이 남도 출신 일색이라, 모진 배트세례에 노출되어 주10대씩, 도합 1,000대의 맷타작을 당했지만, 잘 견뎌내어 총기 사고를 저지르지는 않았다.나보다 지금 늦게 입대한 전방사단의 최영오일병은 자기를 핍박하던 고참병2명을 사살하여, 1963년 3월 20일, 서울 30사단 사격장에서 총살형이 엄중히 집행됬다.‘고향길’을 조명하기 위해, 소론이 길었지만,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전국 단위 매체에 작품이 뽑힌 것은, 동아일보(1962년 8월 14일)의 동아시조란에 뽑힌, ‘고향길’이다.동아일보사에서 국민시조부흥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동아시조’를 공개모집 하고, 원고료도 지급했는데, 원고료는 100원 이었다. 100원은 지금 돈가치로는 3만원 정도다. 당시 최고문예지 현대문학 정가가 40원이요, 노점에서 파는 백반(白飯)이 10원이었다.10원짜리 백반의 반찬이나 음식은 시골 생일상보다 훨씬 푸짐했다. 당시 교통비는 전차의 경우, 군인 1원 일반인 2월이며 서울시내버스비는 군인 2원 50전, 일반인은 5원이니, 이 당시 100원의 위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동아일보가 모집한 동아시조는 1962년 7월부터 12월 까지 13회에 걸쳐, 공모했는데 입선작은 도함 130편이 되었다. 나는 네 차례에 걸쳐 뽑혀, 최다 입선(最大入選)의 기록을 세웠고, 서울 육군본부의 명물 사병(名物士兵)으로 등극(?)했다.나의 첫 입선작 ‘고향길’은 6행의 단시(短詩)지만, 만만찮은 고심작(苦心作)으로, 심사위원이 판정했다. 난생 처음 당시 최고신문이던 동아일보에 뽑혀, 침상머리맡에 그날 동아일보를 놓고 잤더니, 한밤중 불시순찰을 나오신 당시 육군 본부 대대장 이승만 중령님이, 날더러 ‘귀관(貴官)은 꿈속에서 신문을 읽는가?’하며 웃었다. 하늘을 나를 듯한 내 기쁨, 천하를 다 얻은 듯한 득의만만함을 누가 알겠는가? 작은 성공도 소중하게 여기면, 큰 성공을 하는 것도 시간문제다.1962년 동아일보 동아시조 공모 네 차례 입선은, 1967년 중앙일보 선춘문예당선으로 대박을 터뜨렸고, 오랜 문학청년의 껍질을 깨고, 당당한 기성시인이 되었다.시는 단순한 명예욕의 산물이 아니다. 억지로 시를 지으면, 시가 제대로 될 수 없다. 세계적 대시인 워즈워드시백(詩伯)말씀처럼, 자연유로(自然流露)가 되어야 한다. 시상(詩想)의 전개는 순리를 따라야 한다. 물(감정)이 넘치려면, 독에 물을 철철 넘치도록 가득 채워야 한다. 나도 감정이 무르익기(성숙)전에 제대로 된 시가 나올 수 없었다. 군에 자원입대하여 남생 처음 고향과 이별하여, 그리움을 깨닫고, 그리움을 키우므로, 인격과 감정이 성숙하게 되었던 것이다.(시)고향길/김시종//어쩔 수 없이 떠나는/야속한 길/오실젠 기쁨만이/가실젠 서름한 길/재회를 못내 비옵던/다사론 이 길이여.//(동아일보/1962년8월14일)이 글 가운데 다사론(다사롭다) 서름한(서름하다)은 고유한 우리말의 발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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