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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82세 시옹(詩翁)이 노래한 ‘엄마·아빠’시

홈페이지담당자 기자 입력 2023.01.26 08:21 수정 2023.01.26 08:21

국제PEN 한국본부 자문위원 김시종


환경 중 가장 중요한 환경이 자연환경이 아니라, 가정환경이다.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어떤 자식을 만나느냐가 개인의 행·불행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변수다. 올해 82세의 나에겐 지난날 모진 가난보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 더 큰 한이다.

필자가 100일 된 태아일 때, 아버지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사인은 병사(病死)였다.

모진 가난 때문에 돈 드는 교육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궁하면 통하는 법, 나에겐 삶의 원리가 정면돌파(正面突破)였다.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기성시인이 됐고, 1969년 문교부 시행 중등 준교사 고시검정 ‘역사과’에 단발 명중(당년 합격)하여, 중진시인이 되고, 국공립 중·고등학교장이 된 것이 단적인 보기다.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극한 가난을 이겨내고 당당히 자수성가(自手成家)를 이룩했다. 큰딸의 아들, 외손자는 만 3세 때 가정 방문한 한글교사(여)에게 단 한번 한 시간의 지도를 받아, 단번에 한글을 해독했다. 그 여교사는 교사 15년 만에, 처음 만난 신동(神童)이란 감탄을 아낄 줄 몰랐다.

나는 한(恨) 많은 삶을 살았지만, 한(恨)보다 보람이 컸다. ‘청상과수’인 어머니를 소재로 쓴 ‘우는 농’은 만 30세 때 시 작품이었고, ‘선친(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지은, 시 ‘병과의 투쟁기’는 만 80세 때 지었으니, 두 시는 50년 세월의 간격이 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두 편의 시의 공통점이 두 시편이 모두 17줄(行)이다. 제 시를 주의 깊게 읽으신 애독자 제현께 하느님의 축복이 있을진저!

-우는 농-

머리맡에 놓여 있는
오동장롱이 밤만 되면 웁니다.

오동장롱은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해 오신 거랍니다.

장롱 속에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던
입성도 들어 있습니다.

오밤중에 홀로 깨면
따닥 따닥… 장롱 우는 소리에
소름이 끼쳐

장롱을 할머니 방으로
옮겼으면 싶어도
청상인 어머니는 한밤중에 몰래 일어나
우는 장롱을 어루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장롱에 아버지의 넋이 깃들어 운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나서부턴
장롱에 흠이 질까 봐
장롱 옆에서 나를 못 놀게 하셨습니다.


-병(病)과의 투쟁기-

이 세상에서 가장 불치병(不治病)이 가난이다.
이 세상에서 암보다 난치병이 가난이다.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불같은 성화 때문에
잘 나가시던 직장을 억지로 포기하고
한 겨울에 만주 목단강 철교 공사 현장에
막노동자가 되었다.

시베리아 뺨치는 만주의 겨울,
스물세 살의 우리 아버지는
발이 썩는 모진 동상에 걸렸다.

억지로 버티다가 귀국했지만,
귀국하여 스물여섯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일찍 낙명(落命)하셔서
우리 어머니와 어리던 삼남매가
무일푼의 가난 속에서 죽을 고생을 다했다.

뭐니 뭐니해도
암보다 난치병이 가난이다.
가난이 세상에서 첫째 큰 염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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