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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심청(深靑)과 장수옥(張水玉)효녀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5.28 14:47 수정 2017.05.28 14:47

심청과 장수옥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출천(出天)의 대표녀(大孝女)다. 둘다 어린 십대(十代)에 가정을 위해 인신(人身)매매를 자처했다. 심청은 심청전의 내용대로 판단착오를 일으킨 환장(?)한 부친을 위해, 뱃사람에게 몽은사에 바칠 공양미 3백석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 인당수의 다이빙 선수가 되었고, 장수옥(張水玉)은 1864년 조선천지가 살년(殺年·대흉년)이 들어, 곡식을 구하지 못해, 부모님이 굶어죽을 딱한 지경에 이른다.장수옥은 자기인생을 생각하지 않고, 심청의 일가(?)인 청송 심씨의 집에 자진하여 노비로 팔려갔다.장수옥의 몸값은 달랑 엽전 16냥이었다. 어떤 고마운 학자가 조선시대 화폐가치를 요리조리 살펴본 경과, 엽전 한냥은 요샛돈으로 치면, 7만원이다. 신사임당 한 장(오만원권)에 이율곡 넉장(오천원권 4장)이다. 착한 소녀 장수옥의 몸값은 16냥 x 7만원 = 112만원 밖에 안된다. 영조시대 쌀값을 보니, 엽전 16냥으론 쌀 5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덤핑(부당투매)은 조선시대에도 엄존했으니, 장수옥은 자기인생과 나중에 태어날 자녀들의 인생까지, 엽전 16냥에 방매(放賣)한 꼴이다. 거기에 비해 심청의 몸단가(單價)는 조선시대 최고의 기록이다.조선시대 머슴 1년 새경(품삯)이 쌀 3가마니에 불과한데, 심청의 몸값은 300석이나 되니, 장수옥 몸값의 150배나 된다. 사이비 종교의 특징은 여성에게 성상납을 강요하고, 재물을 갈취하는 것이 고금상통(古今相通)이다. 불교소설인 심청전엔 심청이 환생하여 황후가 되었다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사항일 뿐이다. 심봉사는 딸을 팔아먹은 비정(非情 )한 아버지로 남들의 지탄을 받으며, 밤마나 심청이가 인당수에 수장되는 악몽에 시달렸을 것이다.몽은사 화주승덕분에, 몽은사에선 거창한 불상 점안식을 하고, 예불소리가 구성졌을 것이다. 지금도 모모한 종교단체 실무자는, 돈이 없으면 눈알이라도 빼 팔아 헌금하고, 장기를 팔아 헌납하라고 혹세무민하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 있다. 세상엔 믿을 놈 없고, 쥔보탤 나그네 없다는 말이 어떤 경전의 구절보다 실감이 난다.종교든 정치든 상식을 벗어나면, 탈선종교요, 탈선정치다. 조선시대 심청전의 작자는 자기 이름을 숨겨, 영원한 역사속의 도피자가 되었지만, 서양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 못지않게 직필(直筆)을 휘둘렀다. 심청전의 심봉사는 7세 때 눈이 멀었는데, 연애 소설대가 선생보다 음담패성의 대가(大家)다.물론 심봉사의 책임이 아니고, 심청전 작가의 뻥(허풍)이겠지만, 심봉사가 제사상에 차린 제물이 조선의 최고관리인 3정승(영상·좌상·우상)과 같이 진설해놓은 것을 심청전에서 보게 되어, 묘한 비웃음이 떠오른다. 쌀단지에 당장 쌀 한 줌이 없는 처지에 3정승급 제사상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진짜 귀신이 있다면, 심봉사가 제상에, 뚝배기에 멀건 보리죽 한 그릇, 장물 한 종지, 냉수 한 사발만 진설해 놓았어도, 부모의 영혼이 감동을 받고 돌아갔을 것이다. 이젠 장수옥(張水玉)효녀노비에게 눈길을 돌려보자. 장수옥이 종년(?)이 된지 꼭 30년만인 1894년 갑오경장때 노비제도가 폐지되어, 법전상으로는 차별없는 평등사회가 된다.장수옥이 그 때 까지 살았다면 44세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 평균수명은 24세 밖에 안되니, 그 때까지 장수옥이 생존했을 가능은 50%나 될지...지금향토사연구열이 들판에 들불이 번지듯, 활활 타오르는데, 어느 고마운 향도사학자가 있어, 효녀노비 장수옥의 생애를 탐구하여, 영원한 효심을 조명해준다면, 진짜 쓸만한 향토사학가로, 그의 구두라도 내가 즐겨 닦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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