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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39시집‘아버지’를 말한다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6.18 14:30 수정 2017.06.18 14:30

말많고 골치 아픈 요즘 세상인데, 나는 모처럼 기쁘기만 하다. 왜냐구요? 최근 나(김시종)의 39시집이 탄생(?)했기 때문이다.김시종 39시집‘아버지’는 국판 71쪽으로 인쇄도 선명하고, 내용도 깔끔하다. 나의 38시집 ‘우는 농’ 은 183쪽으로 많은 내용을 담았지만, 오자를 너무 많이 내어 짜증이 나고, 원고대로 타자를 하지 않는 출판담당자가 야속하기만 하다.39시집‘아버지’쪽수는 71쪽이지만 오자가 거의 없어 기분이 상쾌하다. 39시집 ‘아버지’를 낸 2017년은 필자(나)가 문단에 오른지 51년으로 들어선 뜻 싶은 해다.1967년 중앙일보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이 되었지만, 1960년대는 이 땅 신춘문예의 최전성 시대다. 서울(중앙)에서 발간되는 주요 일간신문 대·여섯 군데서 신춘문예 당성작을 뽑는데, 1967년엔 중앙일간 신문 신춘문예의 당선자 수가 전분야 다해도 30명 밖에 안되니, 신춘문예전성시대(1960년대)에 중앙일보에 당선 됐으니, 신(神)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내 나이는 25세였다. 표제시 ‘아버지’는 아버지가 1941년 7월 14일에 26세 돌아가시고, 나는 아버지를 여의고 만 6개월후인 1942년 1월 14일에 태어나 끝장난 가문(家門)을 가까스로 이어 가게 됐다. 지금 내 나이가 만 75세니, 우리 아버지 사후(死後) 76년만에 비로소 시 ‘아버지’를 짓게 됐다.아버지를 잃은 공백이 너무 커서, 감히 ‘아버지’를 시로 형상화할 수 없었다, 70년대 후반의 할아버지가 된 올해(2017년)3월9일 아침(09시)에 시 ‘아버지’를 짓게 되었다.우리 식구들에게 아버지는 가정의 전부였는데, 너무 일찍(26세)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우리 가족들은 심한 충격속에 살아야 했다. 표제시 ‘아버지’를 적어본다.(시)아버지/김시종//아버지는 쌀입니다./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집엔/쌀독에 쌀이 없습니다//아버지는 장작입니다/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집엔/겨울에도 마당에 장작이 없습니다//아버지는 희망입니다/아버지가 안 계신 우리집엔/가족들도 희망이 없습니다//시 ‘눈 오는 날’은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재종형(김구원씨)을 ‘눈 오는 날’에 떠올리며 지은 따뜻한시다. ‘눈 오는 날’의 시 내용이 따뜻한 것은 재종형 구원형님이 생전에 마음이 따뜻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시)눈 오는 날/김시종//날리는 눈발을 타고/구원형(재종형)이 오신다//어깨에 장작다발을 멘/구원형이 오신다//내 어린 날 겨울은 너무 추웠다/아버지가 안 계신(죽고 없는)우리집엔/늘 쌀독 밑바닥이 보이고/겨울밤에도 아랫목은 냉돌이었다//겨울이 더욱 추운 우리집에 구원형님은 올 때 마다 장작 한 다발을 메고 오셨다//형님이 가져오신 장작 덕분에/그 날 밤은 등이 따뜻했다//지금 구원형님은 눈 이불을 덮고/이천호국원에서 긴 잠을 주무신다//내 마음속의 난로 옆에는 나와 구원형님이 따뜻한 표정으로/노변정담을 웃으며 나눈다//인간성이 넉넉한 재종형을 주신, 신(神)의 은총이 크시다. 아버지가 태어날 때부터 안계셔서, 내 인생이 외롭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값진 눈물을 흘린 것도 신(神)의 각별한 배려가 아닐까?(시)신(神)의 은총/김시종//나에게 눈물의 참뜻을/깨우쳐 주시려고/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우리 아버지를/압수해 가시다/지금까지 낸 나의 시집(時執)가운데 39시집‘아버지’가 가장 애착(愛着)이 간다. 뒤늦게 75세에 얻은 만득(晩得)이라서 그런 걸까? 나의 39시집‘아버지’는 체제도 내용도 깔끔하여, 잘 때도 내가 머리맡에 놓고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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