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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쟁과 여인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06.25 14:30 수정 2017.06.25 14:30

6월은 하기 좋은 말로, 호국보훈의 달이다. 이 땅의 위정자와 민초들은 호국보훈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짚어봐야 할 것 같다.전쟁은 무방비 상태로,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100% 전쟁이 일어난다고 봄이 정확한 사고다. 6.25사변(전쟁)이 일어난 것은, 필자(나)가 점촌국교 3학년 때(만8세)였다. 휴전이 된 것은, 3년 1개월 뒤인, 1953년 7월 27일 22시(밤10시)로, 그 때는 6학년으로 철이 들고 있었다. 6.25가 일어나자, 무기휴교(방학)를 했는데, 철부지였던 나는 해방감에 환호성을 질렀다.점촌 인근의 함창이 안환건여 돌질(신흥리) 진외가(아버지 외가)로 피난 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6.25사변이 일어나기 9년 전의 일이었다,진외가에서 조금 북?쪽으로 걸어가면, 이안천(길이 48킬로미터)이 있어, 더운 여름날씨 땜에 시도 때도 없이 멱을 감았고, 진외가의 큰 아버지가 외밭 원두막에 앉아, 나에게 꼴부랑이 참외를 던져, 그 맛이 쏠쏠했다.함창이 인민군에게 함락된 것은 1950년 7월 31일 한밤중이었다. 그 때는 라디오도 없어, 전황(전쟁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깜깜나라 였다.함창에서 직선거리 오십리 밖에 안되는 상주 화령장에서 피아공방전이 열흘간이나 이어졌지만, 전혀 낌새도 채지 못했다.그 해 7월 31일 밤, 약골인 나는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 떨어졌다가, 할머니가 큰 일 났다며 사정없이 흔들어 깨워 벌떡 일어나, 이안천 건너, 함창을 봤다니 불기둥이 천지를 환하게 밝혔다.붉기둥 사이로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치솟아 올랐다. 올망졸망 피난보따리를 이고 지고, 캄캄한 밤길을 걸어, 함창면 솔티(신덕리)를 거쳐, 사벌면 먹골로 향했다.먹골에서 아침요기를 하고 있었는데, 부근 뽕밭사이로 미국흑인병사들이 낙동강가로 후퇴하고 있었는데, 10분도 채 못되어, 인민군들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사벌면 퇴강리 강언덕에 도착했을 때는 나룻배도 파괴되고 없어, 돗질 진외가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며칠 뒤엔 고향집이 있는 점촌 중신기로 돌아와 하루 세 시간씩 공습의 위험에 노출되어, 지긋지긋한 세월을 3개월정도 지나야 했다.9월26일, 영강의 동무지에서의 임시 피난처에서 노숙을 마치고 이 날 아침 해 뜰 무렵 행군종대로 진격하는 국군선발대에게 응원의 박수를 쳤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국군은 점촌을 향해 진격을 했다.약 두 달만에 우리 국기, 태극기를 보니, 너무 반가워 뜨거운 눈물이 볼을 흥건히 적셨다. 애국이란 어려운 게 아니었다.오랜만에 태극기를 보고,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화끈한 애국이다. 그 해(1950년) 10월 2일엔, 38선을 돌파하고, 힘찬 북진이 전선을 달구었다.압록강가에 국군선발대가 진격하여, 혜산진의 압록강에서 물을 길어, 군인수통에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기념으로 선물하기도 하여, 통일이 다 된 것처럼 환호했지만, 200만을 훨씬 넘는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전장은 다시 후퇴하여, 1951년 1월4일엔 다시 서울을 뺏기고, 기약없는 후퇴가 이어 졌다.그 때 내가 살던 점촌에도 후퇴한 국군2사단이 주둔하게 됐다.우리집에도 2사단의 소대본부가 있었다. 소대본부엔 소대장 윤상사님의 사모님인 19세의 김영자 아줌마가, 소대원과 같이 지냈다.김영자 아줌마는 서울에서 여학교(여·중고)를 다니다가 잘못 되어, 전선의 철새가 된 것 같았다.불과 9세인 나에게도 상냥한 서울말로 존댓말을 써서 매력이 있고, 예뻐 보였다. 그 때 우리집엔 70대 중반의 할머니가 중병에 걸려, 약도 제대로 못쓰고, 어려운 투병을 했는데, 김영자 사모님은 보급품으로 받은 소고기를 한번도 안빼먹고 나눠 주셔서, 할머니가 며칠간을 더 사신 것 같다.전세의 호전으로 김영자사모님도 군복을 입고 쓰리쿼터를 타시고, ‘학생(나), 공부 잘하세요.’ 마지막 인사를 하셨다.그 뒤 김영자 사모님(당시19세)은 가끔 생각은 났지만 다시 뵙지는 못했다. 전쟁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이벤트다. 5학년 2학기 때, 서울에서 여생도인 김상분이 전학 왔다. 상분에 아버지 김사영 선생님은, 문경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문경고등학교 초대 교감선생님인 지성인이셨다,김상분 학우는 전교과 성적이 뛰어나, 촌놈인 나를 자주 놀라게 했다.상분학우는 노래를 썩 잘하여, 내 귀를 자주 놀라게 했다. 상분학우 덕분에 학급분위기도 좋아지고, 공부에 재미를 느끼게 됐다.상분학우는 점촌국교 졸업후, 문경중에 진학해, 1학년 1학기때 서울 정신 여중으로 전학해, 그 뒤 이화여대 불어불문과를 졸업하고, 일류대학 교수 부인이 됐다.전쟁이 일어나면 결단나는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젊은 남자(입대·전사), 젊은 여자(성폭력노출/미망인), 짐승(도살·보신용)이 큰 폐해를 입는 것이 세계적 통례다.김영자 아줌마(19세, 여학교중퇴·전선철새)김상분(서울에서 전학오다. 같은반 동창)의 행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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