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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말(言)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08.02 18:28 수정 2016.08.02 18:28

예나 지금이나 막말이 다툼의 주요원인이다.1966년 경북 성주에서 자기를 촌놈이라 한다고, 말을 뱉은 사람을 물고 냈다.필자가 국민 학교 3학년 때 6.25사변이 일어났다.그 때 우리 동네(점촌 중신기)에 인민군 소대 본부가 있었는데, 백모양(20세) 박모양(20세), 인민군소대본부에 드나들며, 청소도 하고 인민군들과 히히닥거렸다.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인민군이 후퇴하게 되었다.인민군에게 부역하던, 백모양, 박모양은 진격해온 국군에 붙들려 총살형을 받게 되었다.‘시간이 촉박하여 너희들을 묻어 줄 수 없으니, 각자 제 무덤을 파라.’ 는 국군병사의 명령대로 백, 박 두 처녀는 맨 손가락으로 무덤을 파고, 목만 겉에 내높고 몸은 무덤 안에 넣었다.그야말로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판 것이다.‘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느냐?’ 는 국군의 말에, 평소 머리가 잘 돌아가고, 교회에 다녀 언어 훈련이 잘된 백모양이, “더러운 인민군 손에 맞아 죽는데, 국군의 손에 죽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고 대한민국 만세 삼창까지 부르자, 이들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감동한 국군이 백모양, 박모양을 즉각 풀어 주었다.백모양은 문경시 가은읍 시골마을에 사는데, 불원에 구순노파가 된다.조선시대 때 가장 천민은 백정(白丁)이었다.노비보다 더 대우가 못했다.열 살도 못된 양반 아이가, 회갑을 넘긴 백정 노인에게 말을 높고 하는 것이 당시의 법도였다.시골 사는 양반들이 5일마다 열리는 읍내장(邑內場)에 나들이를 간다.의관(衣冠)을 갖춰 입고, 장죽(長竹)을 오른손에 들고 타박타박 황토 길을 걸어 장터로 간다.읍내장 가게에 들려, 선지국밥을 한 그릇 시켜 먹는다.조선시대뿐 아니라, 1970년대 중반까지도 돼지고기 맛이라도 보자면 한해치고 한가위와 설날이 되어야 한다.진주의 경우, 가게의 선지국밥은 백정들의 전유물이다.백정들은 일반시민들보다 더 잘 살았다.아무리 못 살아도 상민들은 푸줏간을 열 수 없으니, 푸줏간은 백정들의 독점 기업이었다.백정들은 천하다하여, 국가에서 조세도 징수하지 않았다.백정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별로 없었지만, 사회적인 하대(下待)가 사무치게 서러웠다.백정가게에서 오랜만에 선짓국을 먹으니, 평소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집 식구들이 눈앞에 밟혀, 두 양반은 푸줏간에 들려, 고기를 사게 된다.박장근(일명. 박상인)이란 늙은 백정이 여는 푸줏간을 찾았다.양반갑이, “얘, 장근아, 고기 한 근 썰어다오!” “예, 드립지요.” 하며 박장근이 날렵하게 고기 한 근을 썰어 주었다.양반 을이, “여보게 박 서방, 고기 한근 썰어 주시게.” “예, 드립지요.” 하며 고기를 썰어주었다.양반 갑이 양반 을의 고기를 보고, 성질을 버럭 냈다. “백정놈이, 눈깔이 삐었나, 고기양이 이게 뭐냐? 저양반의 고기는 내 것보다 배도 넘는다,” 박장근은 양반 갑에게 명쾌하게 대답을 해준다.“앞의 고기는 박장근이가 썰어 드린 것이고, 뒤의 고기는 박 서방이 썰어 드린 것입니다.” 결국 백정(白丁) 제도는 갑오경장(1894년)에 계급타파로, 사민평등이 이뤄졌지만 그 동안 백정은 역사의 오늘에서 오랜 세월 신음을 해야 했다.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 땅엔 양반 갑의 망령이 살아 있어, 국회의원, 정객 관료들도 막말의 달인(達人)이 되어, 국민화합을 저해하는 불씨가 되고 있다.돈 안들이고 남을 기분 좋게 하는 것이, 고운 말을 쓰는 것이다.말은 비수보다 더 흉기다.비수에 찔리면 치료하면 낫지만, 독한 말은 독화살 보다 고약하며 평생 치료가 안 된다.우리 국민들이 경제적으론 세계 상위권인 15등 안에 들지만, 국민 행복지수는 아프리카의 미개국만도 못하다.혀를 잘 훈련 시켜, 남에게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을 하기위하여 애쓰면, 우리 사회도 타목이 줄어들고, 밝게 웃으면서 사는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말(言)은 말 한필이 전 재산목록인 마부의 말(馬)보다 소중한 자산임을, 꿈속에서라도 잊으면 안될 것이다.김시종/시인·한국펜클럽본부경북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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