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연구에서 근현대사연구의 성과물은 상당히 축적됐다. 또한 하나의 사실을 두고, 학술적 논쟁도 많았다. 조선 이전은 비교적으로 연구의 성과물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더구나 신라 등 삼국 이전의 역사는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로 봐야 할 측면이 강하다. 축적된 논문도 거의 없는 편에 속한다.
가야사는 이제 겨우 발걸음을 뗀 편이다. 대가야(가야)에 대한 그동안 성과를 보면, 2020년 김해 대성동 및 양동리 고분서 출토는 뛰어난 유리세공기술 보였다.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가야인들은)구슬을 보배로 삼아 혹은 옷에 꿰어 장식하고 혹은 목에 걸고 귀에 달았다. 2020년 가야시대 대표 고분군인 경남 합천 옥전 고분군(사적 제326호)에서 다라국 장군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굴됐다. 나무덧널무덤 14기와 돌덧널무덤 4기 등 총 18기의 무덤을 새로 발견했다.
지난 9일 고령군이 ‘대가야 궁성지 발굴·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대가야 궁성지 정밀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해자 내부에서 대왕명(大王名)토기로 추정되는 토기가 발굴됐다. 고대사 및 고고학 전공자를 대상으로 공개 설명회를 열었다. 2024년 3월부터 대가야 궁성지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대가야읍 연조리 555-1번지에서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 대가야시대 토성벽의 흔적과 해자가 확인됐다. 학계 전문가와 주민을 대상으로 지난 6월 21일 현장공개 설명회를 개최했다.
이후 대가야시대 해자 최하층에서 발굴한 유물을 수습·세척과정에서 ‘大’자와 ‘王’자로 추정되는 글자를 양각(陽刻)한 토기 조각을 발견했다. 대구·경북지역 고대사, 고고학 교수 공개 설명회를 개최했다. 대상 유물은 타날흔이 시문된 장동옹으로 추정됐다. 일부분만 남아있었다. 명문은 음각(陰刻)한 인장으로 찍힌 채 확인됐다.
글자는 비교적 선명했다. ‘大’자와 아래에 ‘王’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있으나, 아쉽게도 하단부가 결실돼, 분명하게 알기 어렵다. 참석한 대부분 전공자는 해당 글자가 ‘王’으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대표적 두 가지 의견은 해당 글자는 ‘王’혹은 ‘干’으로 추정된다. 王의 경우 두 번째 가로가 첫 번째 가로획보다 짧게 쓰였다. 干의 경우 두 번째 가로 획이 첫 번째 가로 획보다 길었다. 해당 글자는 ‘王’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干이라면,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의 학설(진단학보와 진단학회 간 한국사 고대편)에 따르면, 왕을 보좌하는 벼슬 이름이다.
충남대 소장품인 大王명 유개장경호의 경우, 출토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번 출토된 명문토기와는 상호보완적 관계였다. 6세기 중·후엽 제작된 대왕명 유개장경호의 선례를 고려하면, 해당 글자는 ‘王’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간이냐, 아니면 왕이나 하는 것은 지금으로썬 일종의 소모적 논쟁일 뿐이다.
명문 토기의 출토는 대가야사 연구에서 새로운 전환점이다. 대가야의 왕도인 고령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명문이면서, 이를 ‘大王’으로 읽을 때, 대가야 궁성지 실체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잠재울 수 있다. 근래에 제기되는 대가야 고대국가론에 큰 힘이 실릴 것이다. 고령군은 발굴조사기관과 협력해, ‘大王명 토기’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개최하여, 유물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에 대해 논의하기로 했다.
고령군은 금년 하반기부터 대가야권 최대고분인 ‘지산동 5호분’, 고령지역 최대 토기 가마 유적인 ‘합가1리 토기 가마 유적’, 대가야-신라의 접경지대에 축조된 ‘봉화산성’등에 대한 학술발굴조사를 계획한다. 대가야사 연구 복원사업으로 역사문화도시 고령을 조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가야사는 이제 갓 출발점에 섰다. 섣부른 어느 학술연구이든 잠재 울 필요가 없다. 학문은 늘 열린 자세서, 연구가 축적되는 사이에, 또 새로운 발굴품이 나올 수가 있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발굴품과 이론의 성과물이 합치될 때에 가야사는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