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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화가 김홍도화원(金弘道畵員)

박선애 기자 입력 2018.02.12 20:07 수정 2018.02.12 20:07

▲ 김 시 종 / 미산올곧문예상 운영회장

궁중화가 김홍도화원은 조선시대의 3대(大) 천재화가(안견·김홍도·장승업)이시다. 호는 단원이며, 본관은 김해·강세황(姜世晃)참판(차관)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주요활동으로는 1771년(영조 47년) 왕세손(뒤의 정조·正祖)의 얼굴을 그렸고, 1781년(정조 5년) 정조의 어진화사로 정조를 그렸다.
1781년 스승 김응환이 몰래 일본지도를 그릴 왕명을 받아 김홍도도 부산까지 동행했으나 스승 김응환이 병사(病死)하여, 단원(김홍도) 홀로 쓰시마(대마도)에 가서 일본 지도를 모사(模寫)해 가지고 돌아왔다. 1790년 수원 용주사 대웅전에 탱화를 그렸고, 그 간의 환원으로 공로를 인정받아 1795년(정조 19년) 충청도 연품현감이 되었으나 민정을 소홀히 하고, 폭음과 수렵으로 나날을 지새,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여 5년 만기인 연품현감 직을 1년도 못 채우고 파직을 당했다.
유능한 화가지만, 훌륭한 지방 행정가는 되지 못했다. 1797년 정부에서 간행한 ‘오륜행실도’의 삽화(컷)을 그렸다. 산수화·인물화·신선그림·불화·풍속화 등 그림 전 분야에 걸쳐 모두 능한 만능화가로 수 많은 작품을 그리고 남겼다. 특히 산수화와 풍속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그의 산수화는 사실적인 눈(眼)과 조국애·조국강산의 미가 담겼다. 신윤복·이인문·김석신·김득신의 화풍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민 사회를 익살과 구수한 필치로 보여주고, 농익은 그림으로 사회현실을 시원하게 풍자하고 있다. 단원(김홍도)은 현대 서양화의 기법인 색채의 농담과 명암을 이용하여 원근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단원 김홍도화원의 명화(名畵)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 볼까나. 단원(김홍도)의 풍속화중 백미(白眉)는 ‘씨름도’·‘서당도’·‘기와이기’·‘빨래터’ 등 이다.
씨름도에는 양반·평민·늙은이·아이들이 씨름판에서 벌이는 묘기 각축전에 빠져 들어가고 있다. 엿장수 아이가 엿목판을 목에 걸고 열심히 씨름판을 누비지만, 그림속의 민초(民草)들은 엿목판보다 씨름판에 주의 집중중이다. ‘서당도’는 조선시대의 초등교육기관으로, 천자문·소학·명심 보감 등을 가르친다.
서당 학동(學童)의 수가 9명임을 ‘서당도’가 보여주고 있다. 김삿갓도 ‘욕설 모 서당’이란 풍자시에서 서당 생도수가 십 명도 못된다고 했는데, 김홍도의 그림이 잘 증명해준다.
서당에는 지도교사인 훈장이 있고, 반장(실장)격인 접장이 있다. ‘기와이기’ 등도 일하는 이들의 협동작업이 눈길을 끌고, ‘빨래터’는 여자 혼자 빨래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 두 명이 더 있어, 방법과 작업에 능률을 더하는 것 같다.
단원 김홍도화원같은 걸출한 천재화가가 있어, 정조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고, 단원 그림속의 당시 생활인을 통해, 민초(民草)들의 생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큰 행복이요 당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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