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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신라불교 初傳地사업, 종교적으로 접근하지 말아야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09.20 17:30 수정 2016.09.20 17:30

구미시는 신라불교문화 초전지(初傳地) 조성을 역사학자 및 불교학자 등 관련학계 석학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추진, 역사적 배경이 부족해 졸속 초전지 조성이 우려되고 있다.특히 구미지역에는 대학에 역사학과나 역사학자가 없고 불교미술, 인도철학, 석가모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가 없이 신라불교 초전지 조성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신라불교 초전의 성지가 구미(선산)이란 사실을 아는 국민은 물론 구미시민들조차 그렇게 많지 않다.지난 2010년 5월 경북도 3대문화권 조성 전략사업으로 초전지 사업이 선정됐다.구미시는 불교 역사현장을 보승·보전하고 불교문화의 전시 체험공간 등을 제공하기 위해 도개면 도개리 일원에 신라불교문화 초전지 조성을 추진하기 위해 2011년 기본계획 타당성 조사 용역을 완료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신라불교 초전지 조성은 부지 3만6919㎡에 총 사업비 200억원으로 불교문화역사관, 체험관, 스토리텔링관 등 건물 2500㎡규모로 오는 2015년까지 사업을 마무리 할 계획었다.그러나 시는 당초 2015년까지 신라불교 초전지 조성사업을 완료할 계획이었으나 타종교의 반발을 의식, 추진력이 떨어져 원활한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고 지지부진, 오는 2017년 6월에 준공 및 개관 예정에 있다.특히 지난해 3월에 역사학자 및 불교학자, 불교미술 및 문화재 전문가 등 관련학계 석학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 토론회를 개최, 역사적인 배경과 향후 구미시의 방향제시를 선행할 계획었으나 뚜렷한 이유없이 백지화시켰다.이번 사업은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구미의 특수성인 구미국가산업단지의 첨단기술과 역사적 문화가 융합된 엔터테인먼트 공간 창출을 통한 관광자원의 가치 극대화와 관광 경쟁력 높이는데 큰 의의가 있다.신라불교는 오늘의 한국불교가 맥을 잇고 있다.이에따라 신라불교의 도입 배경과 신라불교의 개척자, 초전지와 최초 사찰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신라불교 도입의 배경= 신라는 지정학적 여건과 권력체제의 낙후성 때문에 삼국 중 가장 열세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고 전대미문의 문화적 독창성을 이뤘다. 그 원동력은 대승불교 정신의 현실적 응용 때문이었다. 즉 불교정신을 통한 국민정신 융화에 성공했다. 불교의 이상을 관념화시키지 않았고 적절한 현실 타개의 방편으로 적용했다. 화랑 등이 그 실례이다.신라불교는 그 수용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백제, 고구려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백제나 고구려가 하향적(下向的), 다시 말해서 왕실에서 백성들에게 전파하는데 반해, 신라는 다분히 상향적(上向的) 특성을 가진다. 이차돈의 순교가 그 단적인 표본이다.▲세 사람의 개척자= 신라불교 도입에는 세 사람의 위인이 있었다. 묵호자, 이차돈, 법흥왕은 각기 상이한 신분이었지만 신라불교 통일의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었다. 묵호자와 아도가 동일인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지만, 학계는 대체로 동일인으로 보는 추세이다. 모례(毛澧)는 신라 최초의 불교신자였고 그에 얽힌 기사들은 신라불교의 지하화(地下化) 시대를 암시하고 있다. 즉 왕실에 불교를 받아들이기 이전부터 꾸준히 민간 차원에서 불교는 신봉돼 왔던 것이다.▲신라불교와 선산= 신라불교 초전의 가장 중요한 기록은 ‘계림잡전’(鷄林雜傳)과 ‘아도비(阿道碑)’가 있다. 계림잡전의 저자는 김대문(金大問)이고 ‘삼국사기’ 등에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 그곳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눌지왕(417~458) 때 묵호자(墨胡子)라는 사문이 고구려로부터 일선(一善, 지금의 선산)에 왔는데 모례는 집에 굴실(窟室)을 만들어 머물게 했다.묵호자는 양(梁)나라 사신이 외교 예물로 가져온 향(香)의 용도를 말해주고 삼보(三宝)의 신성함을 일러 주었다. 그는 궁중에 초대되어 향을 사름으로써 공주의 병을 낫게 했다.그 후 묵호자는 모례와 작별했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이후로 왕왕히 불교를 신봉하는 이들이 있었다.아도비문은 ‘삼국유사’ 아도기라(阿道基羅)에 인용됐는데 앞서의 기록과 자못 다르다. 우선 태어난 연대가(正始, 즉 240-248)로 돼 있고 미추왕 때(262)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쳤다고 했다. 이후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 하매, 선산 모례의 집으로 되돌아 와서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자절(自絶)했는데 이로부터 불교가 폐지됐다고 한다.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묵호자와 아도는 2백여년의 연대 차이가 있고 양나라 사신이 가져온 예물 이야기와 영험으로 공주의 병을 낫게 했다는 기록은 동일하다.이 두 기록의 공통점을 보면, 묵호자나 아도는 모두 고구려로부터 온 승려였고 이들은 선산의 모례네 집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벌였다. 즉 신라불교의 초전이 고구려를 통한 북위(北魏) 불교 전래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선산은 지정학적으로 고구려에서 신라의 왕경(王京)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점이다. 이 전파루트를 살펴보면 선산→의성→안동 지역에 신라의 전탑(塼塔)이 밀집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신라의 전형적 화강암 석탑이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이전에는 전탑이 주류를 이루었다.이 설화의 주인공 묵호자는 인도(혹은 西域) 출신 승려라고 보고 있다. 검을 묵(墨), 오랑캐 호(胡), 아들 자(子)는 ‘얼굴 검은 오랑캐 자식’이라는 별칭이지 승려의 본명일 수 없다. 더구나 묵호자라는 발음은 무커지(Mukhuji)의 음역(音訳)으로 보는데, 무커지라는 인도 이름은 매우 일반적 성명이다.(참조: 정병조(전 금강대학교 총장) ‘실천불교’ 2002, 불교시대사 p. 97-102)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신라불교의 도입이 늦어진 까닭은 샤머니즘, 산악숭배 등 민간신앙과의 마찰 때문이었고, 그것을 극복한 데는 묵호자(墨胡子)의 공로가 지대했다.신라불교의 초전은 선산지방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차차 서라벌까지 전파됐으며 이미 소지왕(479-500) 때는 불교가 상당한 세력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선산일대를 성역화하는 작업은 문화적 자긍심 뿐 아니라 현실적인 자치단체의 홍보와 수익 증대에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구미란 도시가 공업단지의 이미지와 함께 ‘한국의 정신적 고향‘이란 문화적 색채를 결합하는 의미 있는 일이 되리라고 본다.특히 첨단기술과 역사문화가 융합된 엔터테인먼트 공간창출을 통한 관광자원의 가치 극대화와 지역 관광 경쟁력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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