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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고’(道路考) 유감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09.18 15:40 수정 2018.09.18 15:40

살아 있는 시(詩)는, 시인이 살고 있는 그 시대가 시에 반영되어 있게 마련이다.
자작시(自作詩) ‘도로고’는 유신통치가 기승을 부리던 1974년 10월 말경에 탄생(?)했다. 집(자택)에서 3.2km 떨어진, 직장(문경중학교)까지, 자전거가 없는 나는 늘 걸어 다녔다. 그 때는 시내버스도 없던 시대였다. 3.2km를 걸어가야 하니, 일과시간 시작 90분 전에 집을 출발하여 지각이나 결근은 한 번도 안하고, 개근을 했다.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다 보니, 길 가다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곧 바로 휴지 같은데 긁적거렸다. 문제작에 드는 ‘도로고’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직장에 숙직하러 가다, 점촌 뒷골목인 점촌성당 옆을 지나가게 됐는데, 며칠 전에 길을 파헤치고 자갈을 왕창 깔아놨는데 자갈들이 찍소리도 없이, 납작 엎드려, 평평하게 바른 시멘트길이 길에 뻗쳐 있는게 아닌가.
1972년 10월 무렵 당시에 유신헌법을 반대하는 양심적인 민주세력의 외침이 뜨거웠다. 유신정부에서는 유신악법을 고치려는 반대 세력에게 긴급조치라는 핵무기(?)를 동원하여, 유신헙법 개정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천편일률적으로 15년 유기징역이라는 초중량급 중형(重刑)에 처했다. 양심적인 민주투사는 15년의 무거운 형량에도 굽히지 않았다.
그 날 밤 숙직실에 닿자마자 ‘도로고’(道路考)라는 즉흥시를 지었다. ‘도로고’는 다섯줄(5행)밖에 안 되는, 단시(短詩)지만, 500줄로도 표현할 수 없는 명쾌한 시를 지었다. 그 때 내 나이는 32세의 젊은 시인이고, 청년교사(역사교사)였다. 그 때까지 내가 지은 시 중에 다섯 줄인 ‘도로고’가 가장 짧았다. 다섯 줄 가지고 완성된 시가 될 수 없을 것 같아, 사족(蛇足)을 그리려다 과감하게 ‘다섯 줄’을 굳게 지켰다. 시란 백 줄 길이가 짧은 경우도 있고 오히려 한 줄도 긴 경우가 있는 것이다.
장수나자, 용마 난다고 ‘도로고’를 정서도 하기 전에, 서울의 ‘월간문학’에서 시 1편을 곧 보내달라는 원고청탁서를 받았다. 신작시(新作詩) 1편을 기일 엄수하여 보내라는데, 시 길이가 30줄 이내였다. 한 편 길이가 30줄 이내라는데, ‘도로고’의 경우 다섯 줄 밖에 안되니, 마음이 캥겨 내가 ‘도로고’보다 며칠 전에 지은 열 줄짜리 시 ‘낙법’(落法)을 ‘도로고’와 함께 보냈다.
두 편 다해도 길이가 15행 밖에 안 되었다. 1974년 12월호에 시 ‘도로고’(5줄짜리)와 ‘낙법’(10줄)이 모두 발표됐다. 1974년 연말 보너스로 나에겐 이보다 더 클 수가 없었다. 큰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월간문학 신년호(1975년) 월평(月評)에 ‘도로고’와 ‘낙법’은 짧은 시지만, 이 시대의 진실을 화끈하게 증언한 용기 있는 명시(名詩)라고 격찬했다. 딴 시인에게 조금 미안한 것은, 그 달 월간문학 시평(詩評)란은 짧은 나의 시 2편으로 도배되었다. 내 경우 말고도, 단시(短詩) 중에 명시(名詩)가 많다.
문제작 ‘도로고’를 보여 드린다.

도로고(道路考) / 김시종


포장된 도로 밑에는


많은 돌들이 감금되어 있다.


아스팔트를 밟으면


푹신한 느낌 뿐.


강경한 돌의 감촉을 느낄 수 없다.
                     (월간문학 1974년 12월호)

(2018년 8월 26일 13시 30분)


▲ 김 시 종 시인 /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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