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체연재 칼럼

대한애국부인회를 만든 신여성, 김마리아 항일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09.19 15:04 수정 2018.09.19 15:04

여성들이 항일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식 학교가 생겨난 후 여성교육을 통해서다. 전근대적인 봉건 체제에 갇혀 있던 여성들은 교육을 통해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이른바 ‘신여성’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중 ‘신여성’ 항일운동가 김마리아(1892~1944) 여사, 그녀는 누구인가?
황해도 장연 출신에 아버지는 김윤방, 어머니는 김몽은이다. 아버지는 한학자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마을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큰고모 김순애는 민족지도자인 우사 김규식의 부인이며, 둘째 고모 김구례는 신한청년당의 당수인 서병호의 부인이고, 셋째 고모 김필례는 여성 교육자였으며, 큰언니 김함라는 신학 박사 남궁혁의 부인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민족적 분위기가 강한 가풍 속에서 성장했으며 돌아가실 때까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일관된 삶을 사신 분이었다.
1895년 아버지가 세운 소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할 때까지 가장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네 살 때 아버지를, 열두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의고는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삼촌 김필순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자연스럽게 애국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1906년 이화학당에 입학했다가 연동여학교(현 정신여자중학교)에서 1910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3년 동안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의 교사와 1913년 모교인 정신여학교의 교사를 지내면서 교직원 중 가장 어린 선생님이었으나 고상한 인격과 근면 성실한 태도, 훌륭한 교수법으로 인하여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듬해 일본으로 유학하였는데 일본 히로시마의 긴조여학교와 히로시마여학교를 거쳐, 1915년 동경여자학원 대학예비과에 입학하였다. 1918년 말경 동경유학생 독립단에 가담, 황에스터 등과 구국동지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두 번이나 검거되었다. 몇 개월만 있으면 졸업장을 받게 될 김마리아 여사는 스스로 졸업을 포기하고, 「독립선언서」 10여 장을 베껴, 변장한 일본 옷띠 속에 숨기고 2월 15일 부산으로 들어왔다.
귀국 후 3·1운동 사전준비운동에 진력하였다가 서울에서 일본 형사에게 붙잡혔다. 이 때 모진 고문으로 상악골축농증에 걸려 평생을 고생하다가 돌아가시는 원인이 되었다.
5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그 해 8월 5일 석방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다시 조직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독립투쟁에 있어 중요한 임무를 맡기 위한 준비와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일에 힘쓰던 중 11월 오현주의 배신으로 일망타진되어 갖은 고문을 다 받고 3년 형 선고를 받았다.
『김마리아 제2회 심문조서』에 따르면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 수 있다.
“··· 마리아의 두 무릎 사이에 굵은 장작개비를 넣었다. 그리고 수갑을 채운 두 팔 사이에는 쪼개진 대나무를 끼운 뒤 빨래 짜듯이 비틀어댔다. ··· 터져 나오는 신음 소리를 삼키며 혹독한 고통을 참았다. 그러나 놈들은 다시 악형을 가중시켜 왔다. 그것은 코에 고무 호수를 끼우고 물을 넣는 수법이었다. ···” 그리고는 글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성폭행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3년 형의 복역 중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후 서울 성북동 보문암에서 요양하다 인천을 탈출,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도 상해애국부인회 간부와 의정원 최초의 여성의원 등으로 활약했고,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에도 입학하였다.
1923년에는 미국으로 가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의 도움으로 현지에 정착하고는 흥사단 단우로서의 활동을 하면서도, 1924년 파크대학 문학부에서, 1928년에는 시카고대학 석사학위를, 1930년 뉴욕 비블리컬 세미너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한편, 이곳에서도 근화회(재미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추대된 뒤 재미 한국인의 애국정신을 북돋우고 일제의 추악한 식민정책을 서방 국가에 널리 알렸다.
그 뒤 원산에서 신학강의만을 한다는 조건으로 1935년 귀국하였으나, 1942년부터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이던 김마리아 여사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944년 순국하였다.
처녀의 몸으로 오로지 애국만을 위해 몸을 바친 김마리아 여사와 같은 투사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김마리아 여사를 두고 일찍이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10명만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독립을 위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해 왔는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 김 지 욱 /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