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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아내이자 간호사 출신 투사, 박자혜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10.17 20:26 수정 2018.10.17 20:26

이국땅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다가 ‘외국환 위조사건’으로 대만에서 일경에 체포돼 여순감옥에서 타계한 남편 신채호, 그런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고국으로 돌아와 타다 남은 남편의 뼛조각이 든 궤짝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아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청춘을 나라에 바친 간호사 출신의 독립투사, 그야말로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의 주인공, 그가 바로 박자혜 여사이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인 2009년 7월 충북 청원에서 박자혜 여사 사후 66년 만에 처음으로 대한간호협회 주최로 박자혜 여사에 대한 숭고한 뜻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모식을 개최했다. 이때 며느리 이덕남 씨는 ‘이제야 시어머니를 제대로 보는 것 같다.’며 만시지탄을 느꼈다.
박자혜 여사는 1895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에서 태어났다. 집안형편이 변변치 못했던 박자혜 여사는 대여섯 살 어린 나이에 아기나인 신분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어릴 적부터 총명했던 그는 궁중에서 한글, 소학, 규범, 내훈 등을 익히며 나인 수련을 받았다.
그 후 궁중생활 10년쯤 되었을 때 박자혜 여사는 궁에서 갑자기 쫓겨났다. 1910년 12월 30일 일제가 몰락한 황실에 많은 사람이 필요 없다며 해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궁 조하서를 따라 숙명여학교의 전신인 명신여학교 기예과에 입학하여 2회로 졸업했다. 이후 사립 조산부양성소를 거쳐 1916년부터 1919년 초까지 조선총독부 의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 의료진 대부분이 일본인이던 시절, 그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전문직 여성이었다.
하지만 3·1운동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박자혜 여사는 만세운동으로 총독부 병원에도 부상 환자들이 줄을 잇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항일운동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3월 6일 근무 후 간호사들을 옥상으로 불러 모아 만세 시위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그리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이필주 목사와 연락을 취하면서 간호사들로 구성한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만들어, 간호사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하고 만세운동에 나섰다.
간우회에서는 비밀리에 각종 유인물을 배포하여 독립의지를 불러 일으켰고, 마침내 3월 10일을 기해 간우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그 후 병원 내의 동료들과 의사들을 규합하여 시내 국공립 병원 직원들의 동조로 태업을 주도했다. 이른바 ‘간우회’ 사건으로 박자혜 여사는 결국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당시 일본경찰은 그를 '악질적이고 포악한 여자'라고 보고서에 기록할 정도로 기개를 보였다.
갖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뒤 박자혜 여사는 불순분자로 낙인 찍혀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에 독립 운동가들이 많이 활동했던 중국 베이징으로 길을 떠났다.
중국 망명길에 박자혜 여사는 연경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여대생 축구팀을 조직하여 주장으로 활동하고,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 운동가들과의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박자혜 여사는 1920년, 25살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단재 신채호와 결혼했다.
이듬해 아들 수범을 낳고 1922년에 귀국하여 둘째까지 낳고는 남편 없이 사는 길고도 잔인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나라를 향한 애국심은 멈출 줄 몰랐다. 1926년 12월 28일 오후 2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일경과 동양척식회사 직원을 비롯해 7명을 살상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 거사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격정의 장을 펼쳐낸 장면이었는데, 박자혜 여사는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수차례의 연행이라는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황해도 출신인 나석주를 도와 역사적인 쾌거를 이루게 했다. 지리에 어두운 나석주에게 동양척식회사의 위치를 알려주고 숙식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가에게는 누구나 다 그렇듯이 먹고 사는 문제가 최고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1927년에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69번지에서 ‘산파 박자혜’ 라는 간판을 내걸고 두 아들과 함께 살았지만, 한 달에 아홉 끼를 먹기 힘들 정도 삶이 녹녹치 않았다. 하지만 신채호가 보낸 항일열사들의 독립운동을 목숨 걸고 돕고, 베이징·텐진 일대의 독립운동가와 국내 인사의 연락 임무도 맡았다.
그 후 1936년 신채호가 여순 감옥에서 서거하고, 둘째 아들도 영양실조로 1942년 사망했다. 조국과 남편, 아들을 잃어버린 박자혜 여사도 잦은 연행으로 몸이 상하게 되고 결국 병으로 1944년 10월 10일 남편의 뒤를 따랐다.
‘시대의 풍운아’ 신채호를 남편으로 뒀던 박자혜 여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남편을 바쳤고, 그런 남편을 위해 자신의 삶도 송두리째 바쳤던 것이다. 오십 평생 혹독한 가난과 지독한 외로움, 그리고 지옥 같은 감시 하에 살았던 박자혜 여사가, 이승에서 못다 한 부부의 연을 저승에서나마 오래오래 해로하기를 빌어본다.

김 지 욱(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김 지 욱(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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