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큰 시인 신동집 선생님의 추억(1924-2003)

안진우 기자 입력 2018.12.05 19:16 수정 2018.12.05 19:16

김 시 종 시인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자문위원

코카콜라 회사는 코카콜라가 세계인의 미각을 사로잡아 세계적 기업이 되었지만 우리나라 신동집 시인은 시 ‘빈 콜라병’으로 한국시단의 톱스타가 되셨다.
필자가 신동집 시백의 ‘빈 콜라’를 마신 것은, 1970년 문경군 가은중학교 교사시절, 교무실 내 옆자리 영어과 이찬삼 선생이 심심하면 신동집 시인의 ‘빈 콜라병’을 즐겨 방송했다.  
낭송에 솔깃해하는 옆자리의 나에게 타이핑한 시 ‘빈 콜라병’을 나눠주어, 자연스레 나도 ‘빈 콜라 병’에 중독(?)이 되었다. 알고 보니 이찬삼 선생은 계명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시인 신동집 교수의 애제자였다.
‘근묵자흑’이라더니 옆자리 이찬삼 교사 덕분에 신진 시인인 나도 자연스럽게 신동집 시인의 팬으로 돌변(?)하게 되었다. 경북 도 교육청을 갈 일이 있어, 대구역에서 하차했는데 경북예총회관이 바로 대구역 건너편에 아주 가까이 있어, 경북예총사무실에 들렸다가 명시 ‘빈 콜라병’의 주인 시인 신동집 교수와 우연히 마주쳤다.
가은중학교 이찬삼 영어교사 얘기를 했더니 매우 반가워하셨다. 예술가(시인)는 자기 시를 좋아하는 팬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몹시 기뻐하셨다. 그 일 후로, 신동집 시인 교수는 나를 만나면 팬 (이찬삼 교사)의 안부부터 물으셨다.
신동집 시인과는 대구에 들리면 일부러 약속을 안 해도 경북예총에서 뵐 수 있었고 1973년에는 필자의 제3시집 ‘불가사리’머릿말을 집필해 주셔서, 마음속으로는 늘 고마웠지만 사례는 못해 드려 송구한 마음의 빚을 지고 살게 됐다.
신동집 시인은 지방(대구시)에 살면서도 지방예술가(시인)로는 유일하게 대한민국예술원 문학 분과 회원이 된 자타가 공인하는 중진 시인이었다.
학벌(서울대학교 정치과 졸업)도 좋고 사회적 지위도 계명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이어서, 그야말로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다.
1982년 칼 기 격추사건(소련이 자행)으로 탑승한 아끼는 후배교수가 사망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여러 해 투병하셨지만 끝내 재기하시기 못해 안타까웠다.   
필자와 신동집교수 시인과는 필자와 문학의 사제(師弟)관계로 발전하여 ‘심우도’라는 명시(名詩)를 한편 선사하셨다. 작고시인이 된 시인 신동집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심우도’의 시세계로 빠져 들어가 보자구요.

심우도(尋牛圖)

신동집(덧말:申瞳集)(작고시인. 전예술원회원)

8月도 막바지 날
詩友(덧말:시우) 市宗兄(덧말:시종형)이
뻘뻘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찾아 왔다.
원 예고도 없이 이런담
들어서자마자
시원한 냉수 한 잔 주소서.
우리는 파안대소
오랜만에 회포를 곱빼기로 풀었다.
“좋아하시는 壽石(덧말:수석)몇점
갖고 왔으니
머리맡에 두고 완상하소서.”
고맙게도 우리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청담을 나누었다.
때마침 모과나무 가지에서
소리높이 매미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한참을 울다가 훌쩍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요즘은 壽石道(덧말:수석도)도 완전히 타락했지요.
돈으로 바꾸다니 타기할 일이지요.
지각없는 소인배들이 차를 몰고 와
마구잡이로 돌을 실어가니
한심하지요.
壽石(덧말:수석)이란 걷다 말다
시나브로 줍는 일
주우면 친지에도 보내고
몰래 마음 주지요”
바로 이때다.
힐끔 구리 구리 대머리
市宗(덧말:시종)의 옆모습을 바라본 것은.
순간 나는 알아차렸다.
그의 얼굴이 연성
尋牛圖(덧말:심우도)에 나오는 순한 소를 닮았다는 사실을.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