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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마음으로(이심전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10.31 16:56 수정 2016.10.31 16:56

요사이 진짜로 죽은 것이, 뇌사냐 심장사냐로 맞서고, 해결이 안 났지만, 나는 뇌사가 진짜 죽음이 맞다고 확신한다. 내 마음의 믿음직한 대들보가 되었던 어머니가 뇌사상태에 빠졌던 것은 2000년 12월 24일 새벽4시경이었다. 어머니는, ‘나 죽네.’ 하시면서 쓰러지셨다. 곧바로 119에 신고하여, 5분안에 구급차가 도착하여, 신속하게 문경제일병원 응급실에 입원하여, 구급조치인 심폐소생시술 끝에 호흡은 돌아왔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쓰러진지 33일만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를 살리려고 온 식구가 매달렸지만, 멎어가는 어머니의 숨결을 되살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24세때 청상과부가 되어, 그무 60년을 자식걱정(3남매)을 하시며, 불우한 팔자를 숙명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여,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셨고, 기울어가는 가문을 어느 정도 바로 잡아 놓으셨다. 어머니가 시집오실 때, 삼촌(숙부)의 나이는 7세였다. 고향을 떠나 부산에서 사시던 삼촌이 꿈을 꾸니, 형수(우리 어머니)님이, 소복(素服)을 입고 마루에 앉아 계시더란다. 꿈이 께림칙하여 잠을 깨어 시계를 보니, 새벽4시 (2000.12.24.)였다. 형수의 안부가 궁금했지만 한밤중에 전화를 하면, 우리 식구들이 놀랄까봐 몇시간을 억지로 참다가 전화를 하셨는데, 숙부모님이 꿈에, 소복한 형수(우리 어머니)를 본 시간과 어머니가 혼절한 시간이 똑같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면서 하나밖에 없는 시동생에게 작별인사를 하신 것이다. 사람은 혼(영혼)이 있어, 시간·공간을 초월하는 초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험한 꿈을 꾸신 삼촌(숙부님)도 몇해전 83세를 일기로 승천하셨다. 사람은 참으로 신비로운 존재다. 그러기에 인생을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1960년대 초, KBS라디오 인기가요프로 ‘위문열차’에 출연하여 노래를 불러, 희망과 용기를 주던 미모의 젊은 여가수 동방 성애씨가 근자 정부방송(KTV)의 ‘다시 보는 문화 영화’에 모습을 보였다. 사회자는 가수 겸 희극배우인 김희갑 선생이다. 이 프로에서 동방 성애씨가, ‘그대 떠나던 날’(1963년)을 불렀는데 가창력도 뛰어나고, 무대매너도 세련되고, 미성애다 미모에다 그야 말로, 만점이었다. 명가요 ‘그대 떠나던 날’이 듣고 싶으면 휴대폰에 ‘동방성애’를 찍으면, 노래를 바로 들을 수 있어 뜻밖에 노년의 지루한 생활에, 행복한 젊은날이 되살아나게 됐다. 이 게, 웬 떡이냐? 본명인지 예명인지 알쏭달쏭하던 가수 동방 성애의 본명이 ‘박성애’임도 알게 됐다. 더구나 6.25때 미국에 입양된고아임도 밝혀져, 동방 성애씨의 가슴을 울리는 노래가 깊이있는 인생의 산물임도 알게 되었다. 박재란·이미자·윤항기·윤복희남매도 결혼 가정의 아픔을 딛고, 찬란한 별이 된 것이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극복할 나름이다. 인터넷 동방 성애란에 내 칼럼 ‘무용수 너무 예뻐’가 전재됐다. 아끼는 원로여가수의 코너에 동참하게 된 기쁨이 크다.나는 소망하던 경상북도 문화상(문학부문)을 41세 가을에 받게 됐고, 서울신문이 공모하는 향토문화대상에 응모하여, 전국에서 300여명이 응모하여, 1차로 12명을 뽑았는데, 아홉 번 째로 내 이름이 올라 서울신문 황규호문화부장이 직접 내가 거주하는 점촌까지 취재하러 오셨다.황규호문화부장은 나를 인터뷰 하면서 많이 놀라셨다. 개인 창작활동도 옹골차게 하면서, 지역문화 활동(문협지부장)도 지역문학 활동을 잘 추진한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 날 인터뷰한 내용이 전신사진과 함께 박스기사로 특별취급을 해주셔서, 서울신문을 본 사람들로부터 거리에서 많은 치사를 받았다. 서울신문 향토문화대상이 발표되기 전날밤! 나는 실감나는 꿈을 꾸었다. 평소 술도 안 마시는 내가, 어떤 맥주집에서, 평소 식사자리를 한번도 같이 해보지 않은, 전북대학교 최승범교수와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그 때 내 맥주잔이 홀 바닥에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그리고 꿈도 절로 깨었다. 이튿날 서울신물을 보니 최승범교수는 ‘전북문학’주간으로 단체상(대상)을 받았고, 나는 꿈대로 낙방거사가 되었다. 당선·낙선을 떠나서 현실을 예견한 꿈이 신통방통했다. 그 뒤 (1991년) 공모에 한번 더 응모하여, 서울신문 향토문화상 현대문화 본상을 수상하여, 찬란한 경력도 쌓고, 금상첨화로 상금도 200만원이나 받았다. 인생은 도전하는 자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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