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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종의 협치(協治)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6.11.16 15:54 수정 2016.11.16 15:54

신화는 진실을 감춘다. 사실은 신화 속에서 굴절되고 만다. 공(功)은 부풀려지는 반면 과(過)는 은폐된다. 조작된 이미지만 도드라진다. 의도는 여러 가지다. 온전한 이상형을 제시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고, 페이소스(pathos)를 극대화하려는 뜻도 작용한다. 세종의 이미지도 신화에 가깝다. 세종은 훌륭한 지도자였지만 성인(聖人)은 아니었다. 그는 수시로 욕을 내뱉었다. 신하들과 격한 토론을 벌이다가도 '말만 앞세우는 놈', '감옥에 쳐 넣을 놈'을 남발했다. 모든 정책이 성공을 거둔 것도 아니다. 실패한 정책도 상당수다. 대표적인 게 사창(社倉) 제도다. 사창은 빈민 구호제도다.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준 후 가을에 같은 분량의 곡식에 이자를 더해 갚도록 했다. 본래 취지와는 달리 이자를 거두는 과정에서 관리들의 횡포가 심해 큰 피해를 낳았다. 세종은 정책 실패를 최소화하기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가 '여민(與民)'이다.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여민'은 '위민(爲民)'과 함께 세종의 리더십을 관류하는 키워드다. 세종은 백성들의 정치 참여가 필수라고 여겼다. '위민'은 목표, '여민'은 실천 수단이었다. '여민'을 게을리 하면 '위민'은 '해민(害民)'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백성과 더불어 추진하려는 자세가 세종의 신화를 만들었다. 신하들에게도 백성들을 직접 만나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도록 당부했다. 그는 "백성들이 비록 못 배우고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분명 배울 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도 민심 수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직을 서는 호위군관 한 명만 대동한 채 도성 밖으로 나갈 때가 많았다. 요란한 행렬은 민심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적극적인 토론을 활용했다. 한 두 사람의 생각으로는 정책의 완성도를 높일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중요한 정책은 여러 관계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끝장 토론을 통해 결정했다. '전분6등법, 연분9등법' 같은 조세정책은 무려 17년간의 토론을 거쳐 도입됐다. 전분6등법은 토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6단계, 연분9등법은 풍흉(豊凶) 정도를 바탕으로 9단계로 나눠 세금을 차등 부과했다. 합리적 조세 제도는 비약적 경제력 확대로 이어졌다. 세종 때 농업 생산량은 고려 말에 비해 3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율곡 이이는 100년 후 "세종 때 백성들의 살림이 넉넉해지고, 인구도 늘어났다"며 "그때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이 잡혔다"고 평가했다. 세종은 자유 토론을 통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특히 신하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경계했다. 세종은 "한 사람이 옳다고 하면 다 옳다고 동의하고, 다른 사람이 그르다고 말하면 모두 그르다고 동조한다. 한 사람도 자기 의견을 말하는 자가 없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여민(與民) 정치는 신하들이 열성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좌의정 허조는 유언을 통해 "단 한 번도 나랏일을 임금만의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나랏일은 내 책임'이라는 생각으로 혼신을 다했다”고 말했다. 세종의 찬란한 업적은 협치(協治)에서 비롯됐다. 그는 일찌감치 인간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래서 절대군주임에도 독선의 유혹을 떨쳐버렸다. 만장일치와 다수결 방식으로 정책을 결정할 때가 많았다.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정책은 한글창제 등 일부에 불과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는 협치를 외면한 결과다. 독선과 불통이 파국을 불러일으켰다. 대통령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 배경에 대해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됐다"고 밝혔다. 국가 원수의 말 한 마디로 모든 게 결정됐다. 설립 목적, 설립 과정의 투명성, 기대 효과 등에 대한 논의는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나라가 미꾸라지들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하는 게 당연했다.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었는데 '국민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선과 불통의 결과는 참담하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자부한다. 나라를 위한 정책과 방법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치열한 토론과 공개적인 의사결정과정은 이런 잘못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훌륭한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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