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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라산과 코로나19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20.02.18 19:49 수정 2020.02.18 19:49

김 수 종
뉴스1 고문

한라산의 높이는 1,950m다. 하지만 날카로운 봉우리가 없는데다 방패처럼 둥그스름한 형태여서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어린 시절 제주에서 자라서 그런지 더더욱 한라산이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라산이 높아 보일 때가 있다. 해변에 봄기운이 살짝 감돌면서 백록담 정상이 눈에 덮인 2월이다. 2월 어느 맑은 날 한라산을 바라보면 아름답고 높다. 산을 좋아하는 관광객이라면 당장 남한 최고봉에 올라가고 싶어질 것이다.
1901년 한라산 높이를 처음 측정한 사람은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신문기자였던 지그프리트 겐테(Sigfried Genthe)였다. 높은 산이 없는 독일 중부 평원에서 태어난 겐테는 1890년대 말 제주도 근해를 지나던 기선에서 한라산을 보고는 첫눈에 반했던 모양이다. 그는 일본인 선장에게 상륙하게 해달라고 졸랐으나 선장은 “풍랑이 센 데다 접안시설도 없고, 섬사람들이 해적보다도 포악해서 위험하다”며 말렸다. 천주교도와 민간인 300여 명이 희생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날 무렵이었다.
겐테는 1901년 쾰른신문 기자가 되어 조선에 파견되었을 때 인천에서 배를 타고 그가 꿈꾸던 한라산 등정에 올랐다. 등산로가 없던 당시 2박 3일에 걸쳐 원시림을 헤치고 백록담에 올랐던 한라산 등정 기록은 1905년에 출판된 책 ‘코리아’에 남아 있다.
“아네로이드 기압계로 신중하게 측정해본 결과 분화구 맨 가장자리 높이는 해발 1,950m다. 영국산 기압계는 6,390피트를 가리켰다. 백인은 아직 한 번도 오르지 못한 한라산 정복은 내 생애 최고의 영광이다”
겐테는 백록담 정상에 서서 본 이미지를 초현실적 그림을 그리듯 기록했다. 
“무한한 공간 한가운데 강력하게 솟은 외로운 산 정상에 서 있으면 마치 왕이라도 된 기분이다. 바다와 대기가 만나는 수평선은 끝없이 환상적으로 이어져 그 경계선을 뚜렷이 구분하기 어렵다. 비현실적인 세계에서 헤엄치고 날아다니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라도 하듯 동화 같은 무한으로 이어져 있다”
120년이 지난 지금 한라산은 훤히 뚫린 등산로를 따라 사시사철 하루 수천 명의 등산객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국립공원이다. 겐테가 다시 살아온다 해도 그때 느꼈던 시상(詩想)이 살아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라산 백록담 일대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인류의 보배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보고 싶어 하는 한편, 또 많은 사람들이 백록담이 훼손되는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며 강도 높은 보전을 원한다.
한라산은 사람의 발길에도 잘 허물어지는 현무암으로 생성된 연약한 산이다. 우여곡절 논쟁 끝에 제주특별자치도는 지난 2월부터 백록담 등반을 예약제로 바꿨다. 백록담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 둘인데, 하루 등산객 수를 성판악코스에 1천명, 관음사 코스에 500명으로 제한했다. 명칭은 ‘한라산 탐방 예약제’이지만 사실상 허가제인 셈이다. 난개발과 과잉관광을 걱정하던 시민들 사이에 공감대가 컸다.
그런데 제주특별자치도가 시행 12일 만에 ‘한라산탐방예약제’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사태로 위기에 처한 제주지역 관광업계의 요청을 수용했다는 게 제주도 당국의 공식 해명이다. 제주도의 설명에 의하면, 탐방예약제 중단 조치는 바이러스 사태가 진정되고 제주 경제에 큰 영향이 없다고 판단될 때까지라고 한다.
비명소리를 내는 제주 경제를 볼 때, 제주도 당국의 상황인식은 이해할 만하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제주도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관광객이 작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 북새통을 이루던 제주공항의 한산한 광경은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비행기 좌석은 텅텅 비고, 수많은 호텔 등 관광업소도 폐업 일보 전이다.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잔 값으로 비행기 표를 살 수 있고 렌터카를 하루 빌릴 수 있다니 그 심각성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몇 해 전 조선불황으로 직격탄을 맞았던 거제와 울산을 떠올리게 한다.
과연 한라산탐방예약제를 유보한다고 코로나19로 움츠러든 관광객을 제주로 불러 올 수 있을까. 관광업 종사자의 심리를 달래 줄 조치인지는 모르지만 제주 경제를 살릴 정도로 관광객을 끌어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서야 제주관광 경제가 회복할 것이다. 따라서 우여곡절의 여론 수렴과 고민 끝에 내린 한라산예약탐방제를 시행 12일 만에 중단하는 것은 제주 도정의 가벼움을 말해준다.  
120년 전 켄테가 한라산을 오르기 위해 허가를 받을 때, 제주 목사는 켄테에게 백록담 정상에 함부로 오르면 한라산 신령이 노하여 폭풍우를 내려 흉년이 들게 한다며 허가 일정을 미루려 했다. 농사와 고기잡이에 생계가 걸렸고 과학을 몰랐던 시대의 일이다. 미신이긴 하지만 한라산과 제주 경제를 연결했던 것은 참 미묘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한라산의 노여움을 사면 흉년, 즉 제주 경제가 몰락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라산은 제주 경제의 원천이다. 흔들리지 말고 한결같이 한라산을 잘 보전하는 노력이 제주도를 살리는 길이다. 한라산탐방예약제 중단 조치는 하수(下手) 중의 하수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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