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 열린 제76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 공식 초청받은 영화 ‘내 이름은’은 자신의 이름이 콤플렉스인 18세 소년 영옥과 그 이름을 지어주고 지켜야만 하는 어머니 정순, 그리고 이름 뒤에 숨겨진 50년 전 그날의 약속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영옥은 학교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권력 구조 속에서 점점 위축되며 이름 때문에 겪는 차별과 모욕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되고. 한편, 어머니 정순은 과거를 철저히 숨긴 채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점점 자신의 이름에 숨겨진 의미를 추적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랫동안 숨겨온 제주 4.3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1998년, 주인공 영옥(신우빈 분)은 81년생 고 2학년으로, 자신의 촌스러운 이름과 환갑을 앞둔 늙은 어머니 정순(염혜란 분)의 존재를 부끄러워한다. 특히 정순이 바람이 불고 햇빛이 찬란한 날이면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거나 발작을 일으키는 해리 증상은 영옥에게 있어 큰 창피함이자 공포의 대상이다.
학교생활 역시 순탄치 않은데, 전학생(轉學生) 경태(박지민 분)의 영향으로 얼떨결에 반장이 된 영옥은 단짝이었던 민수(오지호 분)와 멀어지게 되고, 학교 내 세력 다툼과 집단적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는 정순이 겪었던 과거의 국가적 폭력과 영옥이 겪는 현재의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작은 폭력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서로 다른 시간인데도 결국 같은 감정으로 폭력의 역사가 형태를 바꾸어 반복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정순은 기억을 잃고 평생을 살아왔다. 친구 이름으로 살아남은 그녀의 삶은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기억의 상실은 폭력의 세월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편이었다. 정순은 8살 이전의 기억이 완전히 삭제된 채 살아왔다. 하지만 딸 영옥과 갈등과 죽음, 손자를 아들로 키우는 어려움 속에서, 점차 심해지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는데, 거기서 서울에서 새로 온 의사 여희라(김규리 분)의 도움을 받아 까맣게 지워져 있던 어린 시절의 파편들을 하나둘 맞추어 간다.
제주의 곳곳을 누빌수록, 반세기 넘게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그날의 슬픈 약속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억조차 버거웠던 제주의 아픈 비밀이 78년의 세월을 건너, 마침내 진실이 되살아나는 가운데서 치료를 결심한다. 의사는 그녀가 감당하기 힘든 끔찍한 기억을 스스로 억압한 것이라 진단하고, 정순은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만 잃어버린 기억을 하나씩 불러오는 과정에서 그녀가 평생 짊어지고 온 발작의 원인이 제주 4·3 당시의 참혹한 상황의 목격과 상실감에서 기인했음을 깨닫게 된다.
아름다운 섬 제주는 피맺힌 역사를 안고 있다. 아직 채 국가의 기틀을 갖추지도 못한 상태에서 냉전의 국제 질서를 맞아야 했던 우리 민족의 한스러운 자취인 것이다. 이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외면하고 방치한 문제에 대해 이 영화는 폭력의 역사가 일상으로 스며들어서 후대에 대물림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한다. 공식의 역사는 권력에 의해 전해지지만, 그 반대편의 사실들은 망각의 그늘 속에 은폐되기 일쑤다. 영화는 오랜 세월 국가가 저지른 일을 공적 역사가 제대로 기억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이자 저항으로서의 기억을 드러나게 한다.
4·3 사건의 수난을 겪은 이가 월남전에서 다리를 잃고 그 딸이 광주 민주화 항쟁의 피해자가 되는 상황 설정은 역사적 비극을 개연성만으로 하나의 작품에 담아내기엔 어색함도 있다. 또 한 세대를 건너서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로 풀어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영화로 이렇게 4·3 사건을 만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처럼
인상적인 장면은 어린 영옥과 정순이 바닷속에서 나누는 우정이다. 맑은 바다와 푸른 보리밭의 어여쁜 공간이 피맺힌 트라우마의 세월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은 모순이지만 자연은 극히 평화롭고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영화 ‘내 이름은’은 단순히 슬픈 이야기나 과거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이름이라는 가장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해서 기억과 역사로 확장되는 구조다. 정순이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는 과정은 과거의 비극이 치유를 통해 미래의 희망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에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을 찾아라”라는 아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했다. 영화는 지우고 싶었던 이름, 지켜야 했던 이름 이 두 가지 감정이 계속 부딪히면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너는 이름이 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영화를 보고 SNS를 통해 "인간성을 다시 회복하고 사람들이 서로 손잡고 존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 영화가 그 길을 좀 열어주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속 주인공이 이름을 되찾았듯이 제주 4.3의 상처에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아주겠다”라고 밝혔다고 한다.
정지영 감독은 무대인사에서 “참 좋은 영화인데, 보고 나오는 관객 표정이 굳어 있어 걱정스러워 물어봤다”고 했다. 관객들 역시 좋은 영화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가슴 아픈 영화를 보고 웃으며 나올 수는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