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권번 기생' 전통예술 맥을 이었다.

김경태 기자 입력 2025.02.14 19:37 수정 2025.02.16 08:37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권번(券番)은 기적을 만들어 기생을 관리하는 기생 조합이다. 직업적 기생을 길러내던 교육기관이다. 일제시대 기생의 직업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았으며, 권번에 등록이 돼야 기생활동을 할 수 있었다. 권번의 기능은 기생의 교육과정을 관장하고 기생이 요정에 나아가는 것도 감독했다. 손님에게 받은 화대를 관리하고 세금을 정부에 바치는 역활도 했다.

권번의 뿌리는 대한제국 말기의 한성 기생조합과 한일합방 직후의 다동조합, 광교조합에 두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에 고종황제의 연회에 팔도의 기생이 선발됐다. 당시에 평양 기생이 제일 많았으며 일부는 귀향하지 않고 서울에 자리를 잡는 기생도 있었다. 이 때 지방에서 온 향기와 서울 관기 출신의 경기들이 모여 1909년 처음으로 만든 기생조합이 한성기생조합소다. 당시의 경기들은 기둥 서방이 있는 유부기였으며 향기들은 남편이 없는 무부기였다. 관기 출신 향기나 경기는 기생교육을 제대로 받은 일패기생, 이패기생이라 하였고 몸을 파는 기생은 삼패기생이라 해 구분 지었다.

의녀 출신의 약방기생은 궁조댕기를 매고, 상의원과 참선비 출신의 상방기생은 갑사댕기를 달고, 혜민서 의녀 출신의 기생은 통견댕기를 달아 댕기가 없는 맨머리의 삼패기생과 차이를 두었다. 1910년 한일합방 후에 향기 출신 무부기를 모아 만든 것이 다동조합이며 경기출신 유부기를 모아 만든 것이 경화조합, 한남조합, 신창조합 등이다. 1918년 기생조합의 명칭이 일본식 교방의 이름인 권번으로 바뀌게 됐다. 그래서 다동조합은 조선권번 광교조합은 한성권번, 경화조합은 대동권번 한남조합은 한남권번으로 개칭됐다.

1930년대 이난옥, 서산호수, 현맹홍 등은 조선 권번의 유명가기였다. 이들은 장안의 유명한 명월관과 국일관, 송죽관 등에서 손님에게 노래와 춤으로 주흥을 돋우고 화대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지방에서 생긴 평양의 기성권번은 뛰여난 기생교육 과정을 운영했다. 기성권번에는 학감과 부학감을 두고 몇명의 교사가 교육을 담당했다. 월사금을 내고 3년을 수업했다. 입학 자격은 8세~20세까지였으며 수업이 부진하거나 행실이 나쁘면 퇴학시켰다. 졸업 시험을 통과하면 기예증을 받고 기생 활동을 했다.

기생의 학습 과목은 시조와 가곡, 검무, 우의무, 가야금, 거문고, 양금, 노래, 춤, 한문, 시문, 서, 행서, 해서, 도화, 사군자, 산수, 인물, 일어, 독본, 회화였다. 광복직후에 삼화권번이 부활됐고 명월관과 국일관, 동명관의 전속 기생이 서울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다시 예성사로 통합 됐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동시에 해산됐다. 고려 조선 시대에 궁중과 지방관아에서 공연했던 악기무의 종합예술인 정재(呈才)를 담당한 것은 관기들이었다. 해방후 수도의 권번은 해체됐지만 지방에는 사설 국악원으로 변경돼 전통예술이 전승됐다.

권번 기생의 공연은 관객과 마주 보는데서 극장식 무대로 바뀌고 정재는 변형돼 새로운 춤과 안무로 발전했다. 권번 출신 기생이 민족의 전통예술의 맥을 이었다. 진주검무, 호남쌀풀이, 승무등 국가무형문화제 및 지방무형문화제들이 권번 출신 기생에 의해 사장되지 않고 계승된 것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는 기생의 예술행위를 즐기면서도 기생을 천하게 보ㅑㅆ다. 기생이 학식과 예능으로 양반들을 농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생은 고관의 노리개가 되고 천대를 받았다. 특히 일제 때는 식민지 노예로 인권과 정조가 더 심하게 유린당했다.

우리 나라 전통 예술이 처참한 비극을 겪으면서 한을 품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던 기생에 의해 전승되면서 더 깊은 차원의 예술이 됐다. 오늘에 와서는 BTS와 영화, 게임 등 한류가 세계인의 흉금을 파고 들고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다. 기생조합 권번에 묶여 농락을 당하며 가무와 연주를 하고 그림을 그리며 시를 지어 읊었던 기생은 불쌍한 백성이 아니다. 이 나라의 위대한 전사들이다. 그 중에는 벽계수 선비의 지조를 꺽은 명월 기생도 있고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몸을 던진 열사 기생도 있었다.

양반에 짓밟히고 식민지 노예였던 기생들 처럼 지금도 정치와 경제의 권력과 종교와 문화의 도그마에 잡혀있는 여자 기생과 남자 기생도 있고 젊은 기생 늙은 기생도 있다. 지금도 옛날과 같은 기생 권번이 형태를 바꿔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인간은 이 같은 사회적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 나는 이 구속에서 풀려나야 한다. 나의 해방과 나의 광복, 나의 쟈유가 필요하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