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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시집 ‘최상最上의 음악音樂’ 을 펴내며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7.11.29 16:00 수정 2017.11.29 16:00

제가 김시종 40시집을 쳐내게 된 것은, 제게 세월과 끼를 주신 하느님의 은총임을 깊이 깨닫고, 신(神)께 전적(全的)으로 감사드립니다. 문학소년 시절의 내 꿈은 서울에서 펴내는 일간신문이나, 유명한 월간잡지에 내 시(時)한편이 뽑혀 발표되는, 지극히 소박한 것이었다. 한편의 발표의 꿈이 이뤄지니, 제2의시·제3의 시를 계속 발표하는 것이었고 꿈대로 연속적인 발표가 이뤄지고, 한국 중앙문단 데뷔 51년만에 급기야 40시집발간의 큰 꿈이 현실이 되었다. 40시집을 펴내는데, 지인(知人)분들의 격려와 성원도 한몫 아닌 큰 몫을 했음을, 비로소 밝힌다. 대구 봉덕동에 사시는 정영범 장로님의 시집 발간 축하전화를 잊을 수 없다. 내 시집을 받으시면 시집을 차분히 다 읽으시고, 독후감을 겸하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행복합니다’로 널리 알려진 가수 윤항기목사가, 정영범 장로님을 많이 닮으셨다. 윤항기 가수님의 환한 얼굴을 보면, 정영범장로님이 떠오른다. 내 40시집을 낼 때까지 나와 동행(同行)하기로 다집한, 출판인 이선봉선생(1942-2017)이 올 4월 21일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38시집 ‘우는 농’을 내주시고, 한달만에 돌아가셔서 더욱 나를 안타깝게 했다. 39시집‘아버지’를 낸지, 4개월만에 100여쪽의 40시집을 내게 됐다. ‘최상의 음악’ ‘어머니’등 신작시 31편을 비롯하여, 50여편의 시와, 에세이 23편을 실었다. 제 시집의 애독자중엔 저의 에세이 솜씨에 뿅간 분들이 꽤 많다고 한다. 내가 내 시집 말미(末尾)에 에세이를 즐겨 싣는 에세이는, 일간신문에 연재된 칼럼이다. 신문에 발표될 때, 타이핑중에 오자가 겁나게 많이 발생하여, 바로 잡아, 바로 된 칼럼을 싣는, 보완적 의미가 크다.시집을 내자면 작품(시)도 있어야지만, 시집을 낼 수 있는 출판비를 댈 수 있어야 한다. 40시집을 내는데, 내가 월급 받은 걸 과감(!)하게 투자한다. 시집을 내어 파는 게 아니라, 기증을 위주로 하기 때문에 출판비의 20%만 뽑아도 기적이다. 그야말로 적자 대행진이다.내 시집 출판비를 맡아준 독지가를 밝혀, 숨은 선행을 이 기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다음은 독지가 제현이다이상욱 변호사(문경중 23회 졸업·필자 제자)가 4권을 내주었고, 김병연 사장(문경중 26회졸업·필자 제자)가 1권을 내주었다.문경시청의 출판비 보조로 1권을 펴냈다, 내가 낸 시집 40권중 여섯권을 출판비 지원을 받아, 신작시가 빛을 보았다. 남몰래 적선을 한 이분들의 앞길이 더욱 활짝 열리시기를 기원한다.시집 40권중 시집이 제대로 팔려, 본전을 건진 시집은 김시종 5시집 ‘보랏빛 목련’(1981년·시 문학사刊)이었다. 그 때 발행부수는 1천부 였다. 1981년에 필자는 문경읍 문경고등학교 주임교사였다. 40시집을 내어, 내 문학목표 시집 40권 발간을 달성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집을 많이 낸 시인은, 시인 조병화교수로 무려 60권을 펴내셨다. 필자(나)는 시집 40권을 출간하여 대구·경북 시인중엔 최고기록을 세웟다. 시집을 많이 낸 것 자체는 무의미하다. 좋은 시를 담뿍 실은 시집이, 시집으로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저의 40시집 표제시인, ‘최상最上의 음악音樂’을 지상(紙上)에 공개(公開)한다.(시)‘최상의 음악’/김시종·세상에서 저렇게/재밌는 장단이 있을까나?//석 달 계속된 여름가뭄 끝에/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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