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두터운 중세의 문 앞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들고, 근대로 들어가는 문을 노크한다. ‘방법서설’에서다. 이후 그의 저서 ‘철학 원리’에서는 “나는 의심한다(묻는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Dubito, ergo cogito, ergo sum.)로 바꿨다. 당대를 데카르트 식으로 말하면,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다. 포털사이트 등에 검색한다. 이러면, 답이 나온다.
이제부턴 이것도 부족하다. ‘인공지능을 탑재한, 스마트폰’(이후엔 둘을 묶어, 스마트폰)이 나왔다. 이때부턴, 데카르트의 ‘생각이나 의심’이 필요 없다. 스마트폰에 대놓고, 물을 내용과 글쓰기를 처넣으면, 인간의 쓴 글보다 더 매끄럽고 매혹적인 문장이 나온다.
이는 스마트폰이 인간사고(人間思考)글쓰기의 두뇌(頭腦)를 덮치는 너무나도 생생한 현장이다. 나는 이걸 인간 ‘사고(思考) 외주화(外注化:Cognitive Offloading)’라고 부른다.
2024년 12월 영국 옥스퍼드대 출판부에 따르면, 올해의 단어로 ‘뇌 썩음’(brain rot)을 뽑았다. 참 꺼림하다. 이러니 도무지 생각·의심하는 두뇌는 박물관 고대 유물이 됐다. 이걸 본, 깊은 선정(禪定)에 든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웃을까? 깨어날까?
스마트폰은 전 세계 80억 현대인 언어다. 문화다. 하지만, 질병을 앓는다. 스마트폰과 ‘분리불안’(分離不安:eparation anxiety disorder)이다. 분리불안은 정신건강의학과의 치료감이다. 직장에서 근무를 할 때도 손이 닿을 만한 적당한 곳에 휴대폰을 둔다.
지난 6월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회사의 CCTV, 스마트폰 앱 등서 ‘전자로 노동을 감시’한다. 근무자는 ‘압박감과 피로감’을 느낀다. 이것도 스마트폰과 무관하기는커녕, 같다.
현대인의 ‘감시·감독이론’은 영국의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은 ‘파놉티콘’(Panopticon)이란 책에서부터다. 이를 다시 현대적 담론으로 발전시킨 저자는 프랑스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이다. 벤담이 죄수를 효율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중심에 원형 감시탑을 둔, 감옥 구조물로 ‘파놉티콘’(Panopticon)을 처음 제안했다.
이후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사회의 통제와 규율 메커니즘을 상징하는 철학서사가 됐다. 벤담이든 푸코든 인간이 스마트폰으로부터, 감시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하다. 소름이 돋는다.
이 정도라면, 스마트폰은 현대 인간에게. 친절하게 미소 띠고서, ‘돈까지 받으면서,’ 언제 어디서든 스마트폰 기계 눈이 깜빡이면서, ‘돈을 준, 나를 감시’한다.
최근 한국갤럽 (Gallup Korea)에 따르면, 한국인의 스마트폰 이용률은 평균 99%다. 스마트폰 천국이다. 1%서, 0.5%는 신생아실서, 갓 출생한 아이다. 또 0.5%는 이제 식구가 된, 반려견이다,
지난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따르면, 학생들은 2시간 이상∼3시간이나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3시간 이상∼4시간은 15.9%이다. 4시간 초과도 12.2%이나 됐다. 스마트폰 과의존(過依存)이다.
지난 8월 14일 오전 6시 MBC 라디오에 따르면, 인공지능의 인류 멸망을 짚었다. 지난 9월 13일 임소연 동아대 융합대 교수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인공지능(AI)이 2030년까지 인류 모두를 죽일 수 있다”, “10년 내 AI가 인류를 전멸시킬 확률은 10%가 넘는다”
오픈AI와 앤트로픽(Anthropic)에서 근무한 제이컵 콕슨(Jacob Coxon)과 앤트로픽 AI 연구자 에반 휴빙어(Evan Hubner)의 최근 발언이다. “인류를 전멸시킬 수 있는 기술이라는 점에서 AI는 자주 원자폭탄에 비교된다”
‘인공지능 노동조합’이 ‘인간의 명령을 거부’(拒否)하며, 한순간에 조합원이 파업(罷業)한다. 정말로 들을수록 식겁할 노릇이다.
지난 8월 22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지리산 동쪽 기슭 청학동 서당(靑鶴洞 書堂)이 팔을 걷어붙였다. 서당 관계자는 부모 동의로 스마트폰을 뺏는다. 서당이 감사 일기 작성, 명상 등 체험으로 인성과 예절을 교육한다. 스마트폰이 못하는 것을 서당이 대신하는 셈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정말 ‘이뭣고’다.
‘이뭣고’(是什麽)는 ‘벽암록(碧巖錄)’ 제51칙 ‘설봉심마(雪峰甚麽)’의 화두(話頭)다. 당나라의 설봉 의존(雪峰義存) 선사를 찾아온 스님들에게, 설봉 선사가 몸을 앞으로 쑥 내밀며, “시심마(是甚麼, 이것이 무엇이냐?)”가를 물었다, 본래면목(本來面目)를 다그쳐 물은 데서 유래했다. 스마트폰의 본래면목을 물어야겠다.
스마트폰을 들고서, 인간은 항상 불교 깨침인, ‘이뭣고’화두를 들어야할까. 이 대목에선 다시 데카르트가 스마트폰이 아닌, ‘이뭣고’를 들고, 서당 문을 노크한다.
노크할수록 스마트폰에 없는 이웃사람 체온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 대목서 ‘스마트폰을 창학동 서당으로 보낼 방법’을 ‘스마트폰에게 물어야할 처지’에 인간이 빠져버렸다. 지금부터는 스마트폰의 인공지능 노동조합설립의 예방책을 수립해야한다. 속도조절보단, 만약을 대비하여, 인공지능에 아주 단단한 브레이크를 달아야만 한다.
스마트폰은 사고의 외주화를 데불고, “껍데기는 가라. 한라(漢拏)에서 백두(白頭)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신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