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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6·25 전쟁 영웅 박동진 중사

오재영 기자 입력 2023.05.08 08:01 수정 2023.05.08 08:04

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

↑↑ 박동진 중사 기념비

↑↑ 문경시와 박동진함 자매결연 모습.

↑↑ 박동진함 부대 창설 모습.

몇 년 전 문경 관내 초등학생 50명을 대상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확립과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충효교실’을 문경문화원이 운영할 때 4일간 일정의 전담 강사로 위촉받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교육 주제는 충효 중에서 효(孝)는 차기 교육으로 미루고 ‘충(忠)’으로만 해서 오래전부터 문경에 세거한 큰 문중의 조상 중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충신과 문경을 빛낸 호국 인물인 엄흥도, 이강년, 박열, 김용배, 박동진, 5분을 선정 그분들의 업적과 위대한 생애를 기려보고자 하였다. 본고는 5분 중 20세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산화하신 ‘6·25 전쟁영웅 박동진 중사’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박동진 중사에 대한 행적을 알기 위해 노력했으나 출생지 문경에서는 상세한 내용을 구할 수 없어 국가보훈처에서 2016년 ‘이달의 6·25 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되어 낸 홍보 자료를 참고하였다.

위기에 처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1950년 9월 15일에 실행되었던 국제연합(UN)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추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배경에는 인천항 입구에 위치한 덕적도, 영흥도 탈환에 목숨을 바친 박동진(1930.1월 28일∼1950.8.20.) 해군 일등병조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1930년 1월 28일, 문경(유곡동 한절골)에서 태어나 1949년 1월, 해군 신병 12기로 입대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해 8월, 북한군은 연안 가까이에 있는 일부 도서를 점령하고 무고한 일반 주민을 학살했고, 또한 아군 함정의 동정을 감시하는 거점으로 이곳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를 그대로 두면 해군의 동향이나 작전 상황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물론, 당시 유엔군이 시도하려던 인천상륙작전 역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0년 8월 해군은 정보 수집과 교두보 확보를 위해 함정의 승조원으로 구성된 육전대(陸戰隊)를 편성했고,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 작전을 전개하였다. 육전대는 해군에 소속되어 작전을 돕고, 필요할 시 육전에 종사하는 군대로서 지금의 해병대였다. 이때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해군 1함대에서 차출, 육전대 1소대 1분대장으로 참전하였고, 8월 18일에 덕적도를 향해 떠났다. 아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덕적도에 성공적으로 착륙하여 산악고지를 도주하던 북한군을 격파하고 덕적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8월 20일, 영흥도로 진입, 북한군에게 맹공격을 퍼부으며 국군 포로 4명을 구출했다. 북한군은 이미 덕적도를 빼앗긴 상황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영흥도 자체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꼭 필요한 거점이었던 만큼,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를 비롯한 육전대는 끝까지 적을 몰아세웠다.

추격 중 적의 은신처를 발견한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부하들의 전진을 우선 정지시킨 후, 수류탄을 빼내 들고 엄호받으며 단독으로 돌진했다. 첫 번째 수류탄을 성공적으로 투척하고,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던 순간, 안타깝게도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의 가슴에 적의 탄환이 관통했다.

분대장이던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이삼재 부분대장이 이를 대신해 또다시 수류탄을 들고 돌진했고, 적의 집중사격으로 그마저 전사하자 전 분대원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들의 공격으로 해군은 영흥도를 완전히 탈환했고, 덕적도와 영흥도의 탈환은 9월 15일에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인 전공을 올리게 되었다. 박동진이 적의 공격으로 인해 쓰러지면서 무장이 부족했던 동료들을 위해 “내 총 가져가라!” 소리치며 자신의 기관총을 던져준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정부는 피로 조국을 지킨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산화한 우리 문경 출신 전쟁영웅 고(故) 박동진 중사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명명한 해군 유도탄고속함 15함인 ‘박동진함 해군부대’를 창설하고 2014년 4월 1일 취역하여 영해를 수호하고 있다. 

이날 문경시는 해군 박동진함 부대와 자매결연식을 개최했다. 그리고 2017년 3월 24일에는 영웅께서 태어난 고향 마을, 경북 문경시 유곡동 292번지에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표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6·25 전쟁영웅 박동진 중사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문경을 빛내고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우리의 자랑스럽고 위대한 문경인,‘ 6·25 전쟁영웅 박동진 중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도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위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작전을 성공시킨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다.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고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박동진 중사를 추모하며 -

피 끓는 나이
약관, 스무 살에 장렬히 산화하신
6·25전쟁 호국영웅
님이시여!

그날,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님이 있어 오늘, 이 땅이 있고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
그 운명이 걸린
“인천상륙작전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첩보대의 지상명령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야 하는 막강한 임무를 부여받은 님은
불타는 용기와 애국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셨으니

장하도다 그 이름
특수 상륙부대, 해군 육전대
1소대 1분대장 박동진 중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를 점령하고
이어 8월 20일 새벽 영흥도 탈환 작전에 돌입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시다 마지막 발악하는 잔당을 맞아
부하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나가
첫 번째 수류탄에 이어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순간
애석하게도 적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
장렬히 산화하시니
아! 슬프도다

님이시여!
님의 불타는 가슴에서 애국의 붉은 피
솟구치던 그날, 고향 주흘산도 울고
영강도 울었습니다

님이시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
승전의 북소리 지금도 높이 울리고
충무무공훈장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문경의 아들 대한민국의 건아여!
6·25전쟁 영웅이시여!

이제 고이 잠드소서
비록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님의 이름을 단 유도탄 고속함
‘박동진함’이 바다를 지키고 있고
그날의 그 용맹스러운 충의는
대한민국이 있는 한
님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영웅으로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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