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 칼럼

'르상티망'원한 이용해 정치하지 마라

김경태 기자 입력 2024.07.13 10:15 수정 2024.07.14 10:21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 미디어발행인협 회장‧언론학박사 이동한

르상티망(ressentiment)은 강자에 대한 약자의 질투와 시기심을 말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약자가 강자에 대해 가지는 질투, 원한, 열등감 등의 감정인 시기심을 르상티망이라"고 정의했다. 니체는 르상티망을 가진자는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 기준에 복종하거나 르상티망의 원인이 된 가치를 전도시킨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이같은 사례로 기독교인이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교리로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자는 선하다는 교리를 세웠다. 칼 마르크스가 자유와 평등을 근거로 사회주의 이론을 제창하여 노동자와 젊은이가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케 했다.

르상티망의 감정을 촉발시켜 선교와 혁명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르상티망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원망하고 자신들이 억압받는 것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품고 있다. 자기 실패를 타인에게 돌리고 원망하며 자신들이 피해자라 생각한다. 니체는 이같은 르상티망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3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자신의 진정한 욕망과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을 존중하는 자아를 구축한다. 둘째, 개인의 의지력과 힘을 강화하기위해 내면의 힘을 키운다. 셋째, 새로운 가치 체계를 형성해 창조적 삶을 살아간다.

르상티망 사고는 자신에 대한 냉소와 자포자기, 패배,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보다 상대를 질투하고 비난하고 행운이나 신에 의존하게 된다. 인도의 뉴델리와 미국의 실리콘벨리가 4차 산업혁명의 경쟁에서 미국이 앞선 이유는 인도는 자신의 약점을 기도와 내세에 의존했다. 미국은 자신 보다 우수한 상대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집중했다. 아마존 창설자 제프 베조스는 "부러우면 베조스를 이기면 된다"고 했으며 사고방식이 달랐다.

르상티망이 노예 도덕을 만들어 낸다. 노예 도덕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를 부정하고 복수하려 한다.

주인 도덕은 자기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우고 상대의 우수성과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전하고 노력한다. 세상에는 르상티망의 감정에서 빠져 노예도덕의 덫에 걸린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 대통령 선거를 치루면서 노사모와 박사모가 나오고 대깨문과 윤대모, 개딸이 나와서 편을 갈라 한국판 정치 팬덤이 판을 치고 있다.

이같은 진영주의로 팬덤화하는 바탕에 르상티망의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복합적 원인으로 축적된 증오심을 자극해 분노를 분출시키기 때문이다. 우리사회가 세계에서 잘사는 10위 국가가 됐지만 행복지수는 36위다. 세계 유래없는 고속도의 민주화와 산업화가 무엇이 잘못 됐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여러 분야에 심화된 양극화가 문제며, 평등과 자유에 뿌리를 둔 좌익과 우익의 이념 대립이며, 정권을 가진 편과 못 가진 편의 생사 대립이다.

그 양극단에서 독버섯처럼 돋아난 것이 르상티망이다. 자기 당 대표를  조사했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명품백 받았다고 특검하자 하고 국민이 뽑은 대통령 탄핵하자 하고 있으니 북쪽에서는 언제 핵미사일이 날아 올지 모르고, 남쪽 바다에서는 언제 태풍이 닥쳐올지 모르는 위중한 난국이다. 

이 참극을 해결하기 위해 니체가 강조한 노예 도덕을 버리고 주인 도덕으로 돌아가자고 외쳐도 따를 사람도 없다 사회적 약자 못 가진자의 분노가 끓고 있다. 가진자와 못 가진자의 기준도 모호하다. 상대적 빈곤자와 약자의 숫자는 측정하기도 어렵다. 이 불길을 강화시키고 이용해서 먹고 사는 곳이 정치판이고 언론 미디어다. 이 판국에 예수와 공자, 노자가 와도 안 되고 소크라테스와 마호멧, 니체가 와도 중병이 든 개인과 집단을 치유 할 길이 없다.

민심 속에서 나오는 호소는 부디 강자는 탐욕을 줄이고 약자는 분노를 참아 주길 바랄 뿐이다. 부디 가진자는 좀 배풀어 주고 못 가진자는 좀 참아 주기를 빌고 빌 뿐이다. 여러 채 집이 있으면 집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진 땅이 많으면 뚝 잘라 나누어 주면 안 될까. 부디 정치판에서 르상티망을 이용하지 말고 부디 언론 미디어가 노예 도덕을 충동질하지 말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분노정치 원한 풀이 정치 중단해야 한다. 같이 죽지 않고 같이 살기 위해서는 너 죽고 내 살자는 싸움의 고도를 낮추어야 한다.



저작권자 세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