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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사진 신부에서 독립운동가로, 이희경 여사

세명일보 기자 입력 2018.09.13 20:09 수정 2018.09.13 20:09

개항 이래 신문물 유입은 가치관 변화를 수반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머나먼 이국땅인 하와이로 본격적인 노동이민이 시작되었다. 그때가 1902년 12월, 공식적인 ‘디아스포라(Diaspora)’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국인 이민자들은 고달픈 삶 속에서도 미풍양속인 상부상조 정신을 발휘하였다. 또한 한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고자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점차 생활이 정착되면서 한인사회는 청년 결혼 문제에 직면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사진결혼’이었다. 사진결혼은 한국에 있는 처녀들에게 사진을 보내어 선을 보고 혼인을 결정하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1910년부터 미국 내 이민이 금지된 1924년까지 최대 1천여 명의 여성들이 사진신부가 되어 낯선 땅으로 결혼 이민을 떠났는데 이희경 여사도 그 중 한명이었다.
이희경 여사는 대구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이금례였다. 이 여사는 1894년에 대구 계산동에서 2남 2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대구 신명여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당시에는 신여성이었지만, 졸업 직후 사진신부로 하와이로 건너가 1912년 10월 경북 영양 출신의 이민노동자 권도인과 결혼했다. 당시 신부는 18세, 남편은 24세.
미국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가난한 신혼살림에 공부는 꿈도 꿀 수 없어 남편을 적극적으로 내조하며, 다른 한인 여성들과 함께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하는 등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다행이 미주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 후원자인 남편 권도인은 사업수완이 뛰어나 가구사업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의 아이디어가 가장 빛을 발휘한 상품은 대나무 발 커튼이었다. 옆으로 펼치는 대나무 발에 아름다운 그림까지 가미된 것으로 더운 하와이의 날씨에 안성맞춤이었고, 호응도 좋아 샌프란시스코에 공장을 세울 정도로 잘 팔렸다.
그렇게 모은 돈을 평생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놨다고 하는데, 1935년 이후 해방 때까지 신문 『국민보』에 기록된 것만도 1만 달러에 가까웠다고 한다. 또한 권도인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직접 민병대로 나서 자신의 트럭으로 물자를 수송했다. 더불어 두 아들도 입대시켰다. 그의 투철한 항일의식을 보여주는 생생한 대목이다.
이희경 여사도 독립운동에 직접 나섰다. 1919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창립된 하와이 부인단체의 통일기관인 대한부인구제회의 회원 활동을 하며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전쟁에 필요한 후원금을 모집, 제공하였으며, 애국지사 가족들에게 구제금을 송금하는 등 구제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1928년 영남 출신 이극로가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던 길에 하와이에 체류하여 국어강연을 할 당시, 이승만이 이극로를 폄하면서 영남지역 멸시 발언을 하자, 이희경 여사는 경상도 출신 부인들과 함께 대한부인구제회를 탈퇴해 버렸다. 그리고 호놀룰루에서 김보배·박금우·곽명순·박정순·이양순 등과 함께 영남부인회(후에 영남부인실업동맹회)를 새로 결성하고 회장을 맡아 15년간 한인 부인 사회의 발전과 독립운동 후원, 재미 한인 사회의 구제사업 등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1930년 후반부터 독립금과 각종 의연금,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40년대 초반에는 부인구제회 호놀룰루 지방회 대표로서 부인구제회 승전후원금 모집위원, 부인구제회 사료원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의 회원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총 수백여 원의 독립운동자금을 기부하였다.
30년 이상이나 고국의 광복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과 희생을 했지만 이희경, 권도인 부부의 말로는 순탄치 못했다. 해방이 되자 이들 부부는 몇 차례 고국방문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하와이에서 있었던 반 이승만 노선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947년 이희경 여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고, 3년 뒤 권도인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고생하다, 1962년 7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한 장으로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타지에서 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을 위해 싸웠건만 고향땅 한 번 밝아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다.
하지만 40여 년이 지난 2002년 정부는 뒤늦게나마 이희경 부부의 독립을 향한 열정을 잊지 않고 두 사람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2004년 4월에는 그토록 염원하던 고국의 품으로 돌아와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너무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김 지 욱 / (사)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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